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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들' 신상정보도 깠다…월세 택한 청년들 '전세 포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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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는 아무리 거르고 걸러도 결국 피해를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깡통 전세 피해자가 많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이사한 오모(27)씨는 인천과 경기 화성시 등 각지에서 잇따라 터진 전세 사기 사건에 공포를 느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처음엔 전세를 찾았지만 사기 사건이 계속 되고 주변에서도 피해자가 나와서 보증금 4000만원, 월세 25만원에 계약했다”며 “부담이 크지만, 사기를 당하느니 월세 내는 집이 나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19일 오전 화성 동탄신도시 250채 오피스텔 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 임차인이 계약서를 작성한 중개업소를 찾았다. 중개업소는 닫혀 있었다. 연이은 전세 사기 피해에 20~30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전세 포비아가 번지고 있다. 손성배 기자

19일 오전 화성 동탄신도시 250채 오피스텔 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 임차인이 계약서를 작성한 중개업소를 찾았다. 중개업소는 닫혀 있었다. 연이은 전세 사기 피해에 20~30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전세 포비아가 번지고 있다. 손성배 기자

세입자들이 ‘전세 포비아’를 호소하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이른바 ‘빌라왕’과 ‘빌라의 신’ 사기 사건에 이어 최근까지 수도권 곳곳에서 대규모 전세 사기 피해가 연쇄적으로 터지자 전세 제도 자체에 대한 집단 공포 심리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주변인의 피해 사례를 접하거나 잇따른 극단 선택 소식으로 전세 사기의 실상을 알게 된 사회 초년생과 청년들의 공포가 극심하다.

중소기업 청년 전·월세 보증금 대출 제도를 이용해 경기 화성시의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전세 사기를 당한 김모(21)씨는 “당장 원치 않는 집을 떠안으면서 예상도 못 한 9000만원 빚이 생긴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인생도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한강에 가야 하나 고민했다”고 호소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최근 전세 사기 피해를 당하고 차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3명의 임차인도 모두 20~30대였다. 집을 살만한 목돈은 없고 매달 내는 집세는 부담스러워 전세를 선호해 온 청년층이지만, 이젠 허리띠를 더 졸라매더라도 위험이 덜 한 월세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지난 18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경인국철(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8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경인국철(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오산 세교지구에 사는 전모(33)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독립한 뒤부턴 계속 전세로 자취방을 구했는데, 이렇게 전세 사기가 전국에서 계속 터지는 상황에서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를 믿고 또 1억원 넘는 돈을 맡길 수가 있겠나. 매달 나가는 돈은 훨씬 크겠지만 그래도 다음엔 월세를 찾을 생각”이라고 했다.

이 같은 전세 기피 현상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임대차 계약 269만8922건 중 전세 계약은 129만9500건(48.1%)으로, 월세 계약 139만9422건(51.9%)보다 비중이 작았다. 월세와 전세 비중이 역전된 건 법원이 해당 통계를 공개한 2010년 이후 처음이다.

속 터지는 세입자들 ‘나쁜 집주인’ 홈페이지에 관심

전세에 대한 공포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키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이들도 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임차인들이 ‘나쁜 집주인’의 신상을 온라인상에 공개하며, 사실상 ‘사적 제재’에 나선 것이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아빠들을 공개한다는 취지로 개설됐던 ‘배드파더스’ 홈페이지를 차용했다.

현재 나쁜 집주인 홈페이지엔 ‘빌라왕’으로 불리는 숨진 임대인 김모(43)씨와 공범, 빌라 3493채로 임대 사업을 벌여 온 ‘빌라의 신’ 권모(51)씨 등 총 7명의 사진과 주소지, 생년월일 등이 공개돼 있다. 또 전세 사기 피해자 모임 온라인 커뮤니티와 나쁜 임대인 관련 언론기사, 전세 사기를 피하는 방법 등도 정리해 게시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양모(27)씨는 “있는 제도만 가지고는 피해를 예방할 수 없어서 사기가 벌어진 것이라 나쁜 집주인 사이트까지 생긴 것 아니겠냐”며 “나쁜 집주인 신상까지 공개하는 게 합법은 아니겠지만, 수천만원 전세 자금을 잃어버린 기댈 곳 없는 소시민 입장에선 그런 방법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임대인들의 보증금 미반환 등 전세 계약 피해가 잇따르자 '나쁜 집주인' 사이트가 개설돼 관심을 받고 있다. 나쁜 집주인 홈페이지(bad-landlords.com) 캡처

수도권을 중심으로 임대인들의 보증금 미반환 등 전세 계약 피해가 잇따르자 '나쁜 집주인' 사이트가 개설돼 관심을 받고 있다. 나쁜 집주인 홈페이지(bad-landlords.com) 캡처

나쁜 임대인 신상 공개를 허용하는 법도 통과돼, 향후 합법적인 신상 공개도 이뤄질 전망이다. 지난 2월 27일 나쁜 임대인 명단을 공개할 수 있게 하는 주택도시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 취지는 전세보증금 등을 반환하지 않아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보증채무를 이행한 사실이 있고, 보증금 미반환으로 강제 집행, 보전 조치 등을 2회 이상 받은 사실이 있는 집주인의 인적 사항을 공개해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들 사이에선 법 시행 시점이 오는 9월이라 너무 늦고, 신상 공개 대상을 정하는 조건이 까다로워 실제로 이뤄지는 사례는 적을 것이란 불만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동탄의 한 오피스텔 세입자는 “배드파더스에서 나쁜 부모 신상을 공개한 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양육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며 “내 보증금을 떼먹은 임대인도 나쁜 임대인 사이트에 신고했다. 신상이 공개되면 부끄러워서라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상 공개가 빨리 이뤄져서 피 같은 보증금을 떼먹는 전세 사기가 근절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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