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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리더로 재판기록 듣는 판사…“몸 불편할 뿐, 특별할 건 없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로스쿨 재학 중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 법관 2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앞두고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기념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중앙지법]

로스쿨 재학 중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 법관 2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앞두고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기념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중앙지법]

“40대 미혼 독거 중증시각장애인입니다. 달리는 걸 좋아하고요, 시각장애인 구기 종목인 쇼다운 선수이기도 하고,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1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대회의실. 장애인의 날(4월 20일) 기념 강연차 판사들 앞에 선 국내 2호 시각장애인 법관 김동현(41·변호사시험 4회)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김 판사가 ‘미혼’과 ‘독거’를 강조하자 좌중엔 웃음이 퍼졌다.

김 판사는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 중이던 지난 2012년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어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그에게 판사는 “생각이 전혀 없던” 진로였다. 부산과학고와 카이스트를 졸업한 그는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 있어서 공무원시험을 여러 번 봤는데 잘 안 됐고, 정보통신(IT) 전문 변호사를 해야겠다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로 변호사 되는 게 어려워 보였고, 1호 시각장애인 법관인 최영 부산지법 판사 뒤를 따르기로 했다.

시각장애를 갖고 법을 공부하려니 현실적 장애물이 많았다. 김 판사는 “공부가 힘든 건 두 번째 문제였고, 제일 큰 문제는 공부할 책을 구하는 일”이라고 돌이켰다. 뒤늦게(30세) 시각을 잃어 점자 습득이 늦었고, 방대한 법학 서적을 다 점자책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는 국립장애인도서관 등에 의뢰해 문서파일로 변환한 책 내용을 스크린 리더(문자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로 들으며 공부했다.

김 판사는 자신은 운이 좋았지만, 누구나 자신과 같은 현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교수님들께 말씀드리면 책을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었고, 복지재단에서 책을 만들 수 있게 금전적 지원도 해줬다”며 “운이 좋아 공부한 거지, 제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충분히 뒷받침 돼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시각장애인도 저처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로스쿨 졸업 후 서울고등법원 사법연구원과 서울시 장애인권익옹호기관 변호사 등으로 일했다. 다른 장애인을 변호하며 “사법제도에서 장애인 피해자 보호나 지원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학대받은 장애인이 구조돼도 갈 곳이 당시 서울에 네 곳밖에 없었다”며 “(수사기관에서) 발달장애인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거나, 신빙성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전문가를 양성하고 관리해 적절한 방법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21년 임용돼 판사 3년 차다. 재판 기록은 속기사들이 파일로 만들어 주면 스크린 리더를 통해 듣고, 사진이나 영상 등 시각자료도 속기사 설명을 통해 듣는다. 김 판사는 “도면 등을 볼 일이 있으면 3D 펜을 많이 이용한다. 손으로 만지면서 도면을 파악하면 편할 거 같아 도입했는데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낸 에세이집 『뭐든 해 봐요』(콘택트)에 “장애라는 건 불편한 상태에 적응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쓴 김 판사는 강연 말미 청중을 향해 “장애인도 우리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다”며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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