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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고집을 담다, 풀만 먹인 소 곰탕 감칠맛 두 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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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풀만 먹고 자란 소고기로 끓인 이드로 곰탕. [사진 이택희]

풀만 먹고 자란 소고기로 끓인 이드로 곰탕. [사진 이택희]

실패의 이유가 궁금했다. 주인도 만나자마자 그게 궁금하다고 했다. 스스로 말하듯 “에르메스 급 명품 식재료”를 전국에서 모아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렸는데 음식점은 실패했다. 화려한 재료 자랑에 혹해서 꼭 가보려 했는데 그만둔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울산 먼 길이라 차일피일하다가 때를 놓쳤다. 울산에 가는 사람들이 음식점을 물으면 그 집을 꼭 가보라고 권했다. 다녀온 사람들은 다 놀라며 좋다고 했다.

생산자를 직접 찾아내 공급받았다며 주인이 자랑한 식료품들은 다음과 같다.[생산자(존칭 생략)-지역·생산품 순]

자연농=▶강태양 해남 도라지 ▶김영자 부안 생강·마늘·토란대·잎채소 ▶김종화 벌교 배추·무 ▶김태권 단양 들기름·수수·차조 ▶박신옥 제주 귤 ▶최영옥 양평 산마늘(명이)잎.

유기농=▶김재경 경산 샤인머스켓 포도 ▶오복수 청주 양파·고구마·우엉 ▶윤병구 함평 마늘·양파 ▶임영수 강진 쌀·찹쌀 ▶전민철 의성 마늘·고춧가루 ▶전병덕 수원 인삼 ▶정구호 홍천 산머루·무시래기 ▶황치익 하동 보리쌀·생들기름.

특수 생산물=▶김동관 고흥(첨도) 자연산 굴 ▶박성춘 신안 토판염 ▶오연숙(생태농업) 제주 귤·열무·쪽파 ▶오해원 서울(콩플레) 호밀빵·통밀빵 ▶전선희 곡성 천덕산죽로염(9죽염) ▶정영호 무안 자급사료 자연양돈 흑돼지고기 ▶조영현 장흥(풀로만목장) 유기농 풀만 사료로 먹여 키운 소고기·소머리·사골·우족·잡뼈 등도 있다. 모자란 것은 한살림협동조합을 이용했다.

상호, 모세 도운 장인 이름서 따와

핏물을 빼고 초벌 데친 우족·사골을 끓는 물에 넣는 정나미씨. [사진 이택희]

핏물을 빼고 초벌 데친 우족·사골을 끓는 물에 넣는 정나미씨. [사진 이택희]

벽에는 친환경 식재료의 기준을 적어 놨다. 무농약은 유기합성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는 권장량의 3분의 1 이내 시비로 제한한다. 유기농은 농약 3년 이상 전환기를 거친 후 유기합성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농은 하우스나 비닐 멀칭, 유기합성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연생태에 가장 가까운 재배방법이다.

지난달 16일 울산 중심가에 있는 음식점 ‘이드로’를 찾아가 주인 정나미(62)씨를 만났다. 상호 ‘이드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장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가 되도록 도왔다. 그처럼 사람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작명이다.

가기 전에 판매를 중단한 옛 대표 메뉴를 꼭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없앤 메뉴지만 웬만한 재료는 거의 다 남아 있었다. 앞에 소개한 ‘명품 재료’로 차렸던 ‘이드로 코스’다. 코스 음식인데 사진 촬영을 위해 한 상으로 차린 이 날의 음식은 다음과 같다.

왼쪽부터 곰탕 재료 양지·보섭살·사태살, 우족과 사골·잡뼈, 소머릿고기. [사진 이택희]

왼쪽부터 곰탕 재료 양지·보섭살·사태살, 우족과 사골·잡뼈, 소머릿고기. [사진 이택희]

①유자·현미식초 소스를 곁들인 쥐눈이콩 생 청국장 배 채 샐러드 ②호두 고명을 올린 목초 우유와 현미·곡물 죽 ③어린잎 채소와 양상추에 올리브·딸기·옥수수칩·요거트를 올리고 감식초·유자·땅콩·깨 소스로 맛을 낸 샐러드 ④고흥 첨도 김동관씨 자연산 굴로 담근 굴젓과 부안 김영자씨자연농생배추를 곁들인 무안 자연양돈 돼지고기 수육 ⑤한살림 우엉조림 ⑥생 들깨와 볶은 참깨를 섞은 잔멸치볶음 ⑦벌교 김종화 자연농 배추에 풀로만목장 사골국을 넣어 담근 묵은김치 ⑧소백산 우산나물 무침 ⑨한살림 취나물 무침 ⑩어린 머위 순 들깨즙 무침 ⑪풀로만목장소 기름과 직접 담근 3년 된장으로 끓인 벌교 김종화 자연농 시래깃국 ⑫강진 임영수 유기농 쌀, 벌교 김종화 자연농 옥수수, 하동 황치익 자연농 보리쌀로 지은 밥.

펄펄 끓는 완성단계의 곰탕. [사진 이택희]

펄펄 끓는 완성단계의 곰탕. [사진 이택희]

코스에는 해산물(문어 숙회) 한 가지가 있었는데 이날은 준비하지 못했다 한다. 음식 하나하나가 맛의 개성이 살아있고,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맛으로도 야생성이 느껴졌다. 특히 묵은김치는 아삭하면서 알싸한 배추 맛이 특이했다. 씹을수록 깊은 맛이 배어 나왔다. 농약도 비료도 없이 퇴비로만 농사를 짓던 1960년대 시골에서 자랄 때 먹던 그 배추 맛이다. 이른 봄꽃을 물고 나오는 장다리를 꺾어 먹었을 때도 그런 맛이 났다. 자연농 재배 덕에 야성이 살아난 맛이다. 배추의 아삭한 질감이 3년쯤 간다고 한다.

음식 값은 7년 동안 2만원이었다. 그런데 비싸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2일 SNS에 막을 내리는 소회를 밝혔다. “내 인건비를 (한 달에) 100만원 가져가 본 적이 22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청소용역 닥치는 대로 일해서 이 가게 임대료 등 충당해왔다. 가족들 도움도 받았다. 더 이상 이 음식을 하지 않겠다고 예약 손님을 취소했다. 이 음식을 아끼는 몇 분은 거의 충격을 받고 ‘미안합니다, 혼자 너무 힘들게 두어서’라고 한다. 억울한 마음도 든다. 화나는 마음, 서글픈 마음을 누르며 냉장고를 정리한다.” 하루 전에는 이렇게 썼다. “야호, 이드로자연밥상 오늘부터 그만둔다. 어떤 모습으로 새로이 시작할까요.”

옛 메뉴 먹어보니 야생성 느껴져

수지가 안 맞아 7년 만에 접은 ‘이드로 코스’ 상차림. [사진 이택희]

수지가 안 맞아 7년 만에 접은 ‘이드로 코스’ 상차림. [사진 이택희]

다행히 새로운 음식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올해 초부터 풀로만 목장 소고기로 곰탕을 끓여 판매한다고 했다. 1월에 300인분을 끓여 인터넷 공지 6시간 만에 매진됐다. 한 달에 세 번 끓이는 날짜를 어렵게 맞춰 울산으로 찾아갔다. 풀만 먹고 자란 소의 고기이니 맛이 다를 것이고, 음식점 경력 25년에 ‘자연밥상’을 고집하는 요리사가 끓이는 곰탕이라 하니 궁금증이 더했다.

단도직입으로 재료와 조리과정을 묻고 현장을 확인했다. 100인분 끓이는 데 재료는 소머리 하나, 소 앞다리 하나의 사골·우족, 잡뼈 7㎏, 스지(소 힘줄) 2㎏, 양지·보섭살·사태살 1.5㎏이다. 맹물을 갈아주며 8시간 핏물을 빼고, 끓는 물에 넣어 40분 동안 초벌 데쳐 물은 버린다. 고기와 뼈를 씻어 다시 끓는 맹물에 넣고 센 불에 16시간 달인다. 고기는 2시간 20분 삶고 건진다. 잡뼈도 2시간 20분 만에 건져 고기를 뜯어내고 뼈만 다시 곤다. 물 이외에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는다.

곰탕의 첫맛은 다른 곰탕보다 군내 없이 맑고 가벼웠다. 물 말고 어떤 첨가물도 안 들어가 그럴 수도 있고, 고기가 달라 그렇기도 할 것이다. 몇 술 더 뜨자 섬세하고 여운이 긴 감칠맛이 올라오고 뒷맛은 깔끔했다. 풀로만 목장이 강원대 동물생명과학연구소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감칠맛을 내는 핵산이 풀로만 목장 쇠고기 곰탕에는 4가지, 일반 한우에는 2가지 들어있다. 양쪽 다 있는 2가지 핵산 함량은 풀로만 소가 2~4배 높았다. 그 차이가 맛의 차이로 나타난 듯하다.

이렇게 좋은 재료로 약 달이듯 정성을 다해 차린 ‘자연밥상’은 왜 실패했을까. 영상을 활용한 농업 인류학 분야의 개척자인 이문웅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2020년 7월 SNS에 이 음식점을 소개하고 응원하는 글 4편을 잇달아 올렸다. 그중 마지막 글에 충북 단양에서 자영농으로 재배한 들기름과 잡곡을 공급하는 김태권씨는 “이드로 쥔장님은 성질머리 고약한 ‘천사’이세요. ㅎ”라고 댓글을 달았다. 음식 재료와 조리에 쏟는 정성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을 아울러 칭송하는 말이다. 이 칭송 속에 실패의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비늘은 있으나 뿔은 없다는 전설 속 교룡(蛟龍)도 떠올랐다.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곰탕은 대부분 택배로 나간다. 1인분에 550g씩 4인분 세트(5만4000원)로 판매한다. 한 달에 100인분씩 세 차례 끓이니까 생산량은 월 75세트다. 식당에서 식사는 100% 예약제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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