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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매년 1조5000억원, 일 하고도 돈 못 받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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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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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박모(48)씨는 생계를 위협당하는 지경에 직면했다. 건설현장에서 혹한기나 혹서기를 마다치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도 그렇다. 사장(59)이 갑자기 잠적했기 때문이다. 회삿돈을 모두 빼내 갔다. 근로자 74명의 임금과 퇴직금 4억5000만원도 받을 길이 막막하다.

알고 보니 사장은 임금체불로 365회 넘게 신고된 이력이 있었다. 공사현장이 전국에 산재해 박씨 이외에 임금을 못 받은 근로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박씨는 “그동안 행정당국은 뭘 했는지 원망스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임금체불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모 병원 L(45·여)대표는 퇴직 또는 재직 중인 근로자 39명의 임금과 퇴직금 1억3800만원을 안 줬다. L씨는 특히 고령자나 단순 노무직에 더 가혹했다. 병원 운영에 필수요원이 아니라며 다른 근로자보다 장기간(6~11개월분) 임금을 안 주기 일쑤였다. 개업 이래 임금체불만 98차례에 달했다. 병원 수익금은 은닉했다. 근로자의 진정에 따라 고용노동부가 특별 근로감독을 실시해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 L씨는 구속됐다. 모 서비스업체 대표 J(43)씨는 근로자 4명의 임금 1억7000만원을 체불하고, 자신은 월 2000만원짜리 최고급 호텔에서 호화생활을 하다 구속됐다.

체불금액 10년 동안 50% 급증
법 악용한 악성 체불도 늘어나

구제기간 평균 40일, 생계 위협
복잡한 구제 절차 간소화해야

미국 일부에선 절도죄로 엄벌
금융봉쇄 등 사업주 징계해야

사업주, 벌금 내도 남는 장사

회사의 경영 사정이 나빠서 일시적으로 월급 줄 형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근로자도 경영진과 고통을 함께 감내하며 회생에 동참하기 마련이다. 한데 이런 근로자의 심리를 이용해 정부 지원금을 빼먹는 경영진도 심심찮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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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Y(51)씨는 경영상 어려움으로 하도급 업체에 도급금 6억여원을 못 줄 형편에 처했다. 임씨는 대지급금을 노렸다. 근로자에게 주지 못한 임금을 국가가 대신 지급하는 제도다. Y씨는 하도급 업체 근로자를 자신이 직접 고용한 것처럼 꾸몄다. 112명의 대지급금으로 4억89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의 일부는 생활비로 탕진했다.

포괄임금 오남용도 따지고 보면 임금체불이다. 고용부의 익명 신고센터에 올라온 현장의 목소리다.

“고정 연장근로(OT)수당을 월 48시간으로 포괄임금 약정을 했다. 한데 연장근로에 대한 1.5배 가산을 빼고 준다.” “근로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업무도 아닌데 포괄임금제를 적용한다. 법정 연장근로 한도 초과분에 대해 추가 수당을 안 준다.” “초과근무를 해도 8시간만 인정된다. 너무 바빠 휴가도 못 쓰는데, 정산도 안 해 준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포괄임금은 연장·야간·휴일 근로 등이 예정될 경우 계산 편의를 위해 노사가 합의해서 해당 수당을 미리 정해 매달 급여와 함께 주는 임금 산정 방식이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교묘하게 활용된다. 제도를 악용하는 악성 임금체불 행위다.

임금체불은 근로자에겐 소리 없이 퍼지는 통증이다. 제대로 알려지지도, 사회 문제로 다뤄지지도 않는 만성적 생계형 고통이자 홀로 끙끙 앓아야 하는 외톨이형 고통이다. 직접적인 체불 금액만 연간 1조5000억원 안팎이다. 2011년 1조원이던 것이 줄기는커녕 확 불어났다. 그동안의 임금상승률을 고려해도 증가액이 지나치게 가파르다. 포괄임금까지 합치면 그 두 배는 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상황이 이런데도 근로자가 못 받은 임금을 구제받기란 산 넘고 물 건너야 하는 난제로 방치돼 있다. 임금체불은 신속한 처리가 중요한데, 그 기간이 평균 40일이다. 그동안 근로자는 생존 위기에 몰린다. 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나 제재도 약하다. 형사처벌을 해도 소액 벌금형이 대부분이다. 2021년 검찰이 체불로 기소한 1만3044건 중 징역형은 3.5%인 461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벌금형도 체불액 대비 50% 이하가 91%다. 임금을 떼먹고 도망가면 사업주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이다. 행정수단으로 명단을 공개하고 있지만, 도주 뒤 폐업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대지급금을 확대하는 것도 문제다. 변제금을 미납하는 데 따른 제재가 약하다 보니 도덕적 해이가 생기고, 성실한 사업주에 대한 역차별이 생긴다. 재정 부담도 문제다.

임금명세서 프로그램 보급해야

결국 임금체불에 대한 대대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임금체불을 절도죄, 즉 임금 절도(Wage Theft)로 규정해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뉴욕, 뉴저지, 일리노이 등이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선제적 근로 감독이나 악의적 체불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강제 수사로 무조건 정식 재판을 청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해서 체불 자료를 신용정보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아예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도록 해서 회사를 다시 꾸리거나 호화생활을 못 하도록 봉쇄하기 위해서다. 대지급금 지원 한도를 정하고, 변제금 미납이 많은 경우 지급을 제한하는 한편 지연 이자를 법정 최고 이자율로 물리는 등의 수단도 강구해야 한다.

체불임금을 신속하게 구제하고 청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동관청을 찾지 않고, 온라인으로 권리구제를 신청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개편해야 한다. 단순 체불조차 관련 부서 배정→다시 사건 파악→까다로운 사건 처리 식의 복잡한 절차를 통폐합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평소 체불이 없도록 정밀한 임금명세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급하는 방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