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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6·25 포화 속에 탄생한 노동위…약자 위한 기관으로 거듭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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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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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모 금융기관 A 지점장은 지인의 소개로 무역업자를 알게 됐다. 이 사업가는 지점에 거액을 예치하며 재력을 과시했다. 그를 믿은 A씨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투자하기까지 했다. 14억원 상당의 금융기관 신용장도 발급해줬다. 사업상 잘못을 대신 변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그가 운영하던 업체가 페이퍼컴퍼니로 밝혀졌다. 해당 업체에 물건을 납품한 중국업체가 뒤늦게 사기당한 것을 알고 소송을 제기했다. 금융기관이 꼼짝없이 14억원을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회사는 A씨에게 정직 6개월과 7억원의 변상처분(50% 자기책임 부과)을 내렸다. 집까지 저당 잡힌 A씨로선 갚을 길이 막막했다.

A씨는 중앙노동위원회에 하소연했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대출이었지만 대출 과정에 최선을 다했는데, 징계가 과하다는 것이었다. 중노위가 중재에 나서 A씨가 의원면직으로 퇴사하고, 퇴직금으로 1억원만 변상하는 것으로 화해했다.

선진국보다 화해 비율 크게 낮아
분쟁 해결기관이 되레 분쟁 몰입
정권 따라 달라지는 행태 버려야
노조보다 개인 권익 우선 따지길

근로자와 회사 사이 가교 역할

#최근 수도권 모 대학 교수노조와 학교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교수노조는 임금과 수당 3% 인상을 요구했지만, 학교 측은 재정난을 이유로 손사래를 쳤다. 중노위가 조정안을 제시하며 화해를 주선했다. 임금은 동결하고, 특근수당을 3% 인상하는 안이다.

학교 측은 수용했지만, 교수노조가 거부했다. 자칫하면 수업거부 등 파업이란 극한 상황이 빚어질 수 있었다. 중노위의 집요한 설득 덕분에 결국 조정안대로 노사가 화해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노동위원회는 이처럼 근로자 개인의 억울한 사연이나 회사의 불합리한 처분을 구제하는 기관이다. 소송에 따른 금전적 정신적 부담을 덜고, 외부에 소문이 나는 것도 꺼려지는 상황이라면 노동위원회가 이른 시일 안에 처리해준다. 노사 간 집단 분쟁도 조정해 파국을 막는다. 무려 70년 동안 근로자와 회사 간의 분쟁 해결 가교 역할을 해왔다.

노동위원회의 설립 근거인 ‘노동위원회법’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 어느 법보다 먼저 제정됐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 8일이다.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과 함께다. 이어 근로기준법이 5월 10일 탄생하며 노동법의 틀을 구축했다.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만들었다. 휴전(7월 27일) 이후 형법이 53년 9월 18일, 민법이 58년 2월 22일, 상법은 62년 1월 20일 탄생했다. 해방 이후 좌익이 주축이 된 노동운동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탓에 노사관계 안정이 전후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를 재건하는 관건으로 꼽혔던 셈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당시 제정된 노동관계법의 근간은 ‘산업현장의 분쟁은 상대를 서로 배려하면서 법정에서 다투기보다 화해하며 정리하자’는 기조였다. 노동위원회가 노·사·공익위원 3자로 구성된 합의체인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위원회는 행정기관이지만, 노사관계에 관한 한 법원을 대체할 준사법적 성격을 지닌다. 노사 간에 발생하는 이익이나 권리분쟁을 빠르고 공정하게 조정 또는 판정해 근로자에게는 신속한 권리 구제를, 산업현장에는 불필요한 갈등의 발생을 막는다.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에 앞서 노동위원회의 조정 과정을 반드시 거치도록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해고나 직장 내 괴롭힘, 차별과 같은 고용관계에서 벌어지는 근로자 개인의 갖가지 문제도 다룬다.

이런 노동위원회가 최근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켜켜이 쌓인 굴뚝 매연 때가 노동개혁 바람을 타고 노출되면서다. 김태기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은 “제조업 시대의 노동관계 혼란이 디지털 시대에도 계속돼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다. 노동위원회가 노사 간 집단적 분쟁에 몰입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권에 따라 휘둘리며, 산업현장에서 이념적 홍보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난까지 나오는 판이다. 인적 알박기 논란에, 화해보다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심판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여서다. 4차 산업혁명으로 고용시장이 요동을 치며 개인 분쟁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위원회가 집단 분쟁을 부각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행태는 노사관계 불안을 악화하기에 십상이다. 심지어 해고나 징계 같은 개별 분쟁조차 부당노동행위처럼 집단분쟁인양 화해보다 심판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화해전치주의’가 기조인 노동위원회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지난해 사안 중 84%가 개별 분쟁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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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노사가 대치하는 데 따른 집단 분쟁은 줄어들고, 근로자 개인과 관련된 분쟁이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노동위원회가 처리한 1만6000건 중 84%가 개별 분쟁이다. 오죽하면 “하루에 5건을 다루는 게 일상이 될 정도로 부하가 심하다”는 공익위원의 푸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도 효율성은 떨어진다. 운영 사정이 열악해서 빚어진 결과다. 노동위원회 조사관의 활동비는 0원이다. 근로감독관이 25만원, 국민권익위가 7만~25만원을 받는 것과 비교하면 어이 없는 수준이다. 디지털 환경에 걸맞은 전산화 작업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이러니 현장조사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고, 탁상심문에 기댈 수밖에 없다.

안건을 검토하고 심문(회의)하는 수당도 국민권익위가 50만원, 공정위가 65만원인데 반해 노동위는 36만원에 불과하다. 전문가가 외면하고, 질 높은 심문을 바라기 어렵다. 저투입 저효율의 함정에 빠진 셈이다. 조정으로 마무리되는 분쟁 비율(조정성립률)이 선진국(75%)에 훨씬 못 미치는 51% 수준인 까닭이다. 화해로 해결되는 비율도 영국이나 독일(93%)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64%에 그친다.

김 위원장은 “70년 동안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서 노동위가 많이 왜곡됐다”며 화해 중심의 시스템 구축과 전문성 향상을 과제로 꼽았다. 노동위원회를 찾는 근로자의 80%는 취약계층이다. 시간과 비용이 지원되지 않으면 권리 구제가 어려워진다. 노동위원회 개혁이 기득권이 아닌 약자를 위한 발걸음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