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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무죄” “구속하라” 민심 두쪽 난 미국, 카오스 속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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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10면

트럼프 기소 후폭풍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법원에 출석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그는 이날 34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법원에 출석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그는 이날 34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AFP=연합뉴스]

“그들이 천사라서가 아니다. 전직 대통령 기소가 불법이기 때문도 아니다. 미국 정치의 문민화를 유지하고 권력이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평화롭게 넘어가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

조지 W 부시 정부 때인 2005~2009년 국토안보부 정책차관보를 지낸 폴 로젠즈웨이그는 지난해 7월 애틀랜틱지 기고문에서 전·현직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 미국의 오랜 관행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776년 건국 이래 약 250년간 유지돼 온 이 같은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형사 기소로 깨지면서 미국이 ‘트럼프발 카오스’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친트럼프와 반트럼프 진영을 갈라놓은 극심한 분열과 반목 때문이다.

지난 4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기소인부절차가 진행된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앞 커넥트폰드 공원은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쪽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구호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로고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트럼프는 무죄”를 외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다른 쪽에선 트럼프 반대파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적힌 손팻말을 흔들며 “트럼프를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일부 시위대는 욕설과 고함을 주고받기도 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가려지기도 전에 불붙은 ‘두쪽 민심’의 싸움이었다.

‘두 개의 미국’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3일 발표된 CNN 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기소에 대해 민주당 지지층은 ‘잘한 일’이란 응답이 94%로 압도적이었던 반면 공화당 지지층은 ‘잘못된 기소’라는 주장이 79%에 달했다. 누구든 법 앞에 평등하다는 독립혁명의 기본 이념, 엄격한 법치주의 확립이란 관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라는 견해와 타협·절충이란 정치의 영역이 사법화되는 데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혼재돼 있는 셈이다.

미국 내 진보와 보수 진영 간 균열은 최근 몇 년 새 더욱 심화됐다. 낙태권이나 총기 규제, 성 소수자 권리 등 민감한 이슈마다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립각을 세웠다. 임신 6개월 전까지는 보편적 낙태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이 49년 만에 폐기하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충돌할 때는 “(미합중국이) 미분열국(the Dis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됐다. 비즈니스 인사이더 여론조사에선 ‘10년 안에 내전(Civil War)이 발생할 것’이란 전망에 응답자의 43%가 동의하기도 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분열의 상처가 깊어졌다는 데 이견이 없다. 백인 중심의 ‘아메리카 퍼스트’ 구호 아래 흑인 등 유색인종과 소수민족을 자극해 갈등을 키웠고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가짜 뉴스 양성소’로 몰아붙이며 여론 대립을 조장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부정하고 추종자들의 1·6 의사당 난입 사태를 배후에서 부추긴 전대미문의 혐의는 미국 민주주의 퇴행을 촉발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포르노 배우에게 입막음 돈을 주고 회사 영업 기록을 위조하는 등 34개 혐의로 기소된 건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 이번 기소는 몇 가지 중대한 화두를 던졌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수호 국가라는 오랜 자부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미국 사회 저변엔 전·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보내는 건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란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며 “그런데 이번 일로 이게 깨지면서 큰 혼란에 직면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기소 이후 제기되고 있는 또 다른 논란거리는 ‘허시 머니(Hush Money·입막음 돈)’ 사건이 과연 미국 전·현직 대통령의 불기소 관행을 깰 만큼 중대 사안이냐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첫 기소치고는 혐의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워싱턴포스트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받는 혐의 중 가장 설득력이 떨어지는 케이스”라고 분석했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옥죄고 있는 검찰·특검 수사 중 1·6 의사당 난입 선동 의혹이나 2020년 대선 때 석패한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한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는 의혹 등이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하는 사안으로 평가받는 것과도 대비된다. 문제는 전·현직 국가수반의 단죄가 ‘정치적’ 목적의 공격으로 간주되면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이번 기소에 대해 ‘정치적 박해’ ‘마녀사냥’ 등의 프레임을 씌우며 여론전을 강화하고 나섰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법정 다툼은 내년 초에나 본격화될 전망이다. 마침 미 대선 레이스 중 가장 먼저 치러지는 공화당의 아이오와 코커스는 내년 2월 5일 열릴 예정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전략대로 이번 기소가 2024년 미 대선을 관통하는 핵심 이슈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반면 유불리에 대한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지지층 결집이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호재가 될 수 있지만 본선에선 중도층의 이탈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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