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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노숙인 주머니서 나온 전화번호…그날, 그녀의 삶 바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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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아씨는 지난 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3년간 노숙인 복지를 위해 뛰었던 날들을 회고했다. 심석용 기자

최영아씨는 지난 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3년간 노숙인 복지를 위해 뛰었던 날들을 회고했다. 심석용 기자

“그분에겐 제가 가족이었나 봐요….”

지난 5일 하얀 가운을 입은 최영아(52)씨가 말끝을 흐렸다. 2004년 한 경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면서였다. 경찰관은 “동사한 노숙자인데 소지품에 연락처라곤 하나뿐이었다. 가족이냐”고 최씨에게 물었다. 고인은 최씨가 3년간 치료했던 노숙인 이모(당시 50대)씨였다.

간경화로 거동이 어려웠던 이씨가 병원을 찾아도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인을 받아주는 곳이 드물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씨가 마지막까지 연락처를 갖고 있었던 사회적 끈은 최씨가 유일했다. 최씨는 이 사건이 삶의 전환점이 됐다고 회고했다. “가족처럼 나를 믿고 기대는 노숙인들을 위해 활동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노숙인 외면에 직접 만든 무료 병원 

환자 이모씨(오른쪽 아래)는 사망 직전까지 자신을 치료해준 최영아(왼쪽)의 휴대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3년쯤 이씨가 병원 의료진과 찍은 사진. 사진 최영아

환자 이모씨(오른쪽 아래)는 사망 직전까지 자신을 치료해준 최영아(왼쪽)의 휴대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3년쯤 이씨가 병원 의료진과 찍은 사진. 사진 최영아

최씨가 노숙인들을 처음 접한 건 1991년 무료급식소 봉사에서다. 이후 병원 레지던트로 일하면서도 응급실에서 노숙인들을 자주 만났지만, 의료보험 대상이 아닌 노숙인 환자는 불청객이었다. 지침에 따라 시립병원으로 옮기는 일이 잦았다. 최씨는 결국 2001년 다일천사재단의 도움을 받아 서울 동대문구에 다일천사병원을 차렸다. 병상 30여개를 갖추고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최영아씨는 10여년전 도왔던 노숙인 여성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는다. 사진 최영아

최영아씨는 10여년전 도왔던 노숙인 여성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는다. 사진 최영아

2009년에는 병원 바깥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진료하면서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인에게 근로능력평가용진단서를 발급하는 일을 맡았다. 쪽방, 고시원 등 주거지를 제공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틈틈이 국회 등을 찾아 노숙인 복지 향상을 위해 목소리도 냈다. 2011년 노숙인복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전국의 모든 노숙인이 진료의뢰서를 수령해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게 됐다. 최씨는 2013년엔 여성노숙인을 위한 쉼터인 마더하우스를 만들었고 2017년부턴 수도권의 유일한 결핵전문병원인 서울시립서북병원에서 취약계층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는 “노숙인에겐 정신과 치료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의 2021년도 노숙인 등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노숙인 8956명(2021년 기준) 중 거리 노숙인은 1595명이었다. 조사에서 거리 노숙인의 37.5%는 “병원에 가지 않고 참는다”고 답했다. 2016년(31%)에 비해 비중이 늘었다. 최씨는 “인간관계가 끊기고 불안감에 시달리다 보니 사람을 못 믿게 된 게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가 돌본 한 환자는 다리가 썩어가는데도 병원 치료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의사와 정신건강사회복지사 등이 먼저 노숙인의 마음을 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게 최씨의 말이다.

최영아씨의 진료실엔 노숙인 환자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있다. 심석용 기자

최영아씨의 진료실엔 노숙인 환자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있다. 심석용 기자

노숙인 등 취약계층의 보건 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알려지면서 최씨는 7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리는 51회 보건의날 기념식에서 옥조근정훈장을 받게 됐다. 최씨에게 수상 소감을 묻자 부탁이 되돌아왔다. “아직도 그늘에 가려진 노숙인이 많아요.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게 사회가 관심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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