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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독일 가는 한국판 ‘해적’…무르익는 창작발레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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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국립발레단이 다음 달 독일과 스위스에서 ‘해적’ 공연을 한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송정빈이 재안무해 2020년 초연한 ‘국립발레단 버전’이다. 독자적인 창작 레퍼토리 부족이 오랜 세월 약점과 숙제로 꼽혀온 한국 발레계에 ‘해적’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현지 평단과 관객의 반응에 발레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클래식 발레 영역에서 재안무는 창작만큼의 무게를 갖는다. 기존 고전을 각 발레단의 성격에 맞게 재안무해 새로운 레퍼토리로 만드는 것이 관행이자 추세다. 이를테면 최근 30년 만의 내한 공연으로 화제가 된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은 1991년 재안무한 버전이다. 안무가 장 코랄리와 쥘 페로가 만들어 1841년 초연한 원작을 파리오페라발레 부예술감독 파트리스 바르 등이 다시 매만졌다. 전설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재안무한 마린스키발레단 버전(1895)과는 다른 작품이다.

국립발레단, 다음달 유럽 무대
1863년 러시아서 초연된 고전
무용수 송정빈이 새롭게 꾸며
창작극처럼 저작권 한국 보유

“우리 이야기와 감성 담아야”

다음달 유럽 무대에 서는 국립발레단 ‘해적’. 2020년 송정빈이 재안무하며 새로 집어넣은 장면으로, 해적 두목 콘라드와 심복 알리의 첫 만남 상황이다. [사진 국립발레단]

다음달 유럽 무대에 서는 국립발레단 ‘해적’. 2020년 송정빈이 재안무하며 새로 집어넣은 장면으로, 해적 두목 콘라드와 심복 알리의 첫 만남 상황이다. [사진 국립발레단]

재안무도 엄연한 저작권의 대상이다. 연말 공연의 대명사 ‘호두까기 인형’의 경우 1892년 초연한 프티파 버전의 저작권은 이미 소멸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국립발레단이 공연 중인 ‘호두까기 인형’은 1966년 재안무한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저작권을 갖고 있다.

한국 발레 무용수의 수준은 세계적이다. 파리오페라발레 박세은, 마린스키발레단 김기민,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서희 등이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다.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무용수상도 네 명이나 받았다. 하지만 한국 창작 발레의 존재감은 ‘0’에 가깝다.

시작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62년 창단한 국립발레단의 초기작들은 초대 단장 임성남 안무의 ‘허도령’(1964), ‘화려한 왈츠’(1966), ‘까치의 죽음’(1967) 등 창작 발레로 채워졌다. 물론 당시 발레단의 기술적·재정적 여건이 해외 클래식 발레를 무대 위에서 구현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2년까지 30년 동안 단장을 맡았던 임성남은 재임 기간 ‘지귀의 꿈’(1974), ‘왕자 호동’(1988), ‘고려애가’(1990) 등 여러 창작물을 내놓았다.

1984년 창단한 유니버설발레단도 1986년 ‘심청’, 2007년 ‘춘향’ 등 창작 발레를 선보였다. 하지만 국내 양대 발레단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현재 인기 있는 대표작은 ‘백조의 호수’와 ‘지젤’ ‘오네긴’ ‘라 바야데르’ 등 모두 해외 고전들이다. 안무와 음악, 무대와 의상 등의 수준 차이가 발레팬들 눈에 너무나 명확해서다.

창작 발레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발레계가 한목소리다. 발레에 몸담은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면 “우리의 이야기와 감성·시대정신을 담으려면 우리 스스로 창작해야 한다”는 주장과 “언제까지 로열티를 주고 외국작품 재현에만 매달릴 것이냐”는 한탄이 쏟아진다.

과거 뮤지컬계도 꼭 그랬다. 1966년 ‘살짜기 옵서예’에서 출발한 한국 창작 뮤지컬은 해외 라이선스 작품에 대극장 무대를 내준 채 중·소극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로열티 내고 라이선스 뮤지컬만 만들면 미래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게 10여 년 전이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를 다뤄 해외시장을 공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2014년 초연한 ‘프랑켄슈타인’이 그 포문을 열었고, 이후 ‘마타하리’(2016), ‘웃는 남자’(2018) 등 대형 창작 뮤지컬들이 연이어 등장해 일본으로 라이선스 수출도 했다.

국립발레단의 재안무 프로젝트도 이와 맥락이 같은 시도다. 해외 관객에게 익숙한 고전을 우리 식으로 풀어 세계 무대에 이질감 없이 올려보자는 것이다. 2014년 취임한 강수진 예술감독은 이듬해부터 안무가 육성 프로그램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발굴한 송정빈에게 마리우스 프티파 원작의 ‘해적’(1863 러시아 초연) 재안무를 맡겼다.

4연임 강수진 단장의 숙제

송정빈은 현대인에게 불편할 법한 ‘노예’라는 설정을 ‘대사제’로 바꾸고, 3막 구성을 2막으로 축소해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국립발레단 측은 “독일 비스바덴 헤센 주립극장이 DVD로 작품을 본 뒤 공연 사례비뿐 아니라 110명 공연단 전원의 숙박비를 지원하고 모든 장비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초청했다”며 고무돼있다.

재안무를 징검다리 삼아 창작 발레의 지속적인 개발이 이어지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특히 발레 전용극장의 부재는 안무·음악·무대·의상 등의 유기적 협업을 가로막는 근본적 한계다. 4연임으로 5일 또 3년의 새 임기를 시작한 강수진 예술감독의 어깨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