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63화. 드래곤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완전히 다른 존재가 서로 마음을 나눈다면

오랜 옛날, 세상을 지배하던 드래곤 로드에 맞선 인간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에 몰린 그는 대마법사와 여러 동료의 도움으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 인간과 여러 종족을 해방시켰죠. 간신히 살아난 드래곤 로드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적의 힘을 지닌 자신이 왜 패했는지, 아니 그보다 왜 한낱 인간이 목숨을 걸고 자기에게 싸움을 걸었는지. 시간이 흐르고, 어떤 인간들을 만난 드래곤 로드는 그들과 대화하며 해답을 얻었습니다. 인간이 드래곤처럼 홀로 선 존재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한 여러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느꼈습니다. 그런 인간과 소통하며 자기들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요. 그리하여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 ‘드래곤 라자’가 탄생했습니다.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는 나온 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판타지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혀요. 100만 권이 넘는 판매량을 자랑하며 일본‧타이완‧중국 등에도 소개됐죠.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흥미로운 세계를 엮어낸 이 작품의 매력적인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드래곤 라자’입니다. 라자의 소질을 지닌 인간이 드래곤과 계약하면 둘의 정신이 연결되는데, 이를 통해 드래곤과 인간은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죠. 이 작품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드래곤은 인간 따윈 잡초나 돌멩이처럼 여기며 무시하지만, 라자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게 돼요.

드래곤 라이더는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며 감정을 공유하고 같이 싸우는 사람이다. 애니메이션 ‘드래곤 라이더’와 같이 이런 설정을 자주 볼 수 있다.

드래곤 라이더는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며 감정을 공유하고 같이 싸우는 사람이다. 애니메이션 ‘드래곤 라이더’와 같이 이런 설정을 자주 볼 수 있다.

강력한 힘을 지닌 드래곤 혹은 용은 오래전부터 여러 신화나 전승에서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서양에서 용은 주로 사악한 괴물로 등장하죠. 게르만 신화에선 영웅 시구르드가 난쟁이가 변한 악룡 파프니르를 물리치고 보물을 얻었고, 기독교 전승에선 위대한 기사 게오르니우스가 독을 내뿜는 악룡을 제압했죠. 때문에 많은 기사가 ‘용을 물리친 자’를 뜻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동경하며 모험에 나섰다고 합니다.

1967년 앤 매카프리가 쓴 소설 『퍼언 연대기』 시리즈는 조금 다르죠. 퍼언이라는 별에서 생명체를 파괴하는 외계의 포자 생명체에 맞서는 전사의 이야기를 그린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드래곤이라 불린 거대한 생명체를 타고 하늘을 날며 싸워요. 『퍼언 연대기』의 드래곤은 전설 속 용이 아니라, 퍼언에 사는 생명체인 불도마뱀을 유전자 조작으로 바꾼 생명체입니다. 전설의 용과 닮아 드래곤이라 불리는 이 생명체는 텔레파시 능력으로 기수와 소통할 수 있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면서 드래곤과 기수는 하나의 몸과 같은 일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수가 죽으면 드래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살하고, 드래곤이 죽으면 기수는 절대로 치유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되죠.

특히 드래곤과 관련해서, 인간과 드래곤이 감정을 공유하며 동료로서 함께 싸운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며 싸우는 사람들, 드래곤 라이더(Dragon Rider·용기수)처럼요. 무섭고 강력한 괴물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이야기는 매력적입니다.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처럼 단짝 친구로 나오는 작품도 있죠. 하지만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닙니다. 소설 『테메레르』의 영국처럼 드래곤을 병기나 가축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소설 『로도스도 전기』에선 강력한 마법 장치로 용을 노예처럼 부리기도 하죠.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은 텔레파시가 아니라 촉수처럼 생긴 신경 다발을 연결해서 용 같은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납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라자는 신 같은 존재인 드래곤과 소통하는 존재이자 능력이에요. 마치 신과 대화를 나눈다는 샤먼 같은 느낌을 주죠. 재미있는 것은, 샤먼과 신의 대화가 거의 일방통행인 것과 달리, 라자의 교감은 드래곤과 인간이 거의 하나같은 느낌으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점입니다. 샤먼이 화를 내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신이 화를 내진 않지만, 라자가 화를 내고 기분이 상하면 드래곤도 그렇습니다. 라자가 살해되면 드래곤은 자신의 반쪽을 잃은 듯한 마음에 미쳐 날뛰기도 하죠. 라자는 드래곤이 인간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능력이었지만, 그 탓에 드래곤이 점차 인간처럼 생각하며 변해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퍼언 연대기』에서 용기수가 활약한 것은 용과 기수가 서로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 둘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서로 다른 용의 능력과 기수의 능력이 하나로 합쳐져 세상을 구하는 힘이 된 거죠. 마음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능력, ‘드래곤 라자’.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과 드래곤이 너무 똑같아진 나머지 서로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자신의 개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