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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오류 정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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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31면

한경환 총괄 에디터

한경환 총괄 에디터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입니다.” 30년 전인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포할 당시 이건희 회장이 했던 말이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어떤 변화가 왔을까. 관료나 기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겠지만 정치는 확실히 5류다. 곳곳에 오류투성이다.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탄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근자에 들어서 거의 모든 분야, 거의 모든 사안, 거의 모든 이슈에서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는 무한정쟁이 일상화한 가운데 우리 정치권은 ‘마이너스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선동적 포퓰리즘에 얼룩지고 강성지지층의 맹목적 팬덤정치에 파묻혀 있다. 치킨게임도 이런 치킨게임이 없다. 극단적인 언행으로 정치권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상대방을 악마화함으로써 불신의 장벽이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정치권이 주도하는 분열전쟁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온 나라가 ‘분열증후군’을 앓고 있다.

여야 대화와 타협 사라지고
극단적 언행과 독주 가득 차
정치가 ‘한국 브랜드’ 가치 훼손
국민과 유권자들이 심판해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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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간뿐 아니라 같은 정당 내에서도 내년 총선 공천권을 둘러싸고 파벌싸움이 격심하다. 1년여 남은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올수록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내부 총질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민의힘의 경우 당 대표 최근 선거전에서 불협화음이 극에 달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투표 시 대규모 이탈표 사태가 벌어진 뒤 이른바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 색출 파동에서 당내 충돌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정당이나 당내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당 바깥의 일반 국민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진흙탕 싸움은 정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국익은 뒷전이다. 정치의 가장 큰 임무는 국익 수호일 것이다. 국익과 가장 관련이 많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초당적 협치를 기대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과연 같은 나라 사람들이 맞나 싶다. 한·일 관계 회복 문제를 놓고서 양 진영은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 줬다. 징용피해자 등 관계자들과 사전에 충분히 소통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일방통행식 해법 발표도 문제이지만 ‘삼전도 굴욕’이니 하는 원색적 비난으로 맞서는 야당의 태도 또한 책임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반일 정서를 부추겨 일시적인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결국 국익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북한이 다반사로 탄도미사일을 쏘아 대고 신형 핵무기를 과시하는데도 정치권은 머리를 맞대지도 않았고 손은 놓고 있었다.

민주주의와 정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협상과 타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독주의 광란만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실종된 지 오래됐다. 총체적 난국이다.

무엇보다 국정을 이끌어야 하는 윤 대통령과 여당의 책임이 무겁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지도력은 온데간데없고 대화 시도조차 드물다. 이러고서야 무슨 협치와 타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그 흔했던 국가원로 초청 조언 듣기도 사라졌나 보다. 주 69시간 노동 허용 등 설익은 정책을 내놓았다가 돌연 방향을 바꾸거나 추진동력을 잃어 가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입법 폭주하는 야당에게 면죄부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거대 야권은 다수 의석만 믿고 정부·여당과의 합의도 없이 입법권을 무력행사하고 있다. 야권은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양곡거래법을 법사위도 거치지 않고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해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간호법·의료법 개정안과 방송법 개정안,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도 비슷한 운명을 걸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민주당은 우리 편 체포동의안은 부결시키고 남의 편 동의안은 ‘잡범’이라며 통과시키는 강심장을 자랑한다.

윤 대통령은 여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국회 통과된 법률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입법-행정부 간 반목과 알력은 적어도 새 국회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게 무슨 정치인가. 이게 무슨 민주주의인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권력투쟁인가.

정치권의 극한 대립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 오만한 정치권이 바뀌지 않으면 국민이, 유권자가 정치권을 바꿀 수밖에 없다. 거대 정당들과 정치인들의 일탈은 표로 심판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정치권이 아무리 줄 세우기를 해도 줄 서지 않고, 포퓰리즘으로 유혹해도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중도층이 두터워진다면 정치권 전체에 준엄한 경고를 던질 수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있다. 남북관계로 인한 지정학적 불안요인 등으로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 기업의 주가에 비해 낮게 형성되어 있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정치인 리스크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지 않나 싶다.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정치와 권력의 영향력이 큰 한국에서 정치인들의 어그러진 모습은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정치가 국민과 국익, 기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브랜드’의 가치를 훼손하는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 없는 싸움을 벌이는 정치권이 스스로 반성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023년 한국 정치는 확실히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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