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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자유학기제 실패 드러낸 ‘의대 광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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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의대 ‘열풍’이다. 고교에 불어닥친 의대 열풍에 대학생까지 합세해 그야말로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원회에 제출한 ‘2020~2022학년도 의대 정시 합격자 현황’에 따르면 재학생 합격 비율은 20.2%에 불과했다. 재수생은 42.5%, 삼수생 이상도 무려 36.1%나 됐다. 대학 신입생 모집 정원보다 지원자가 훨씬 많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은 의예과 신입생들을 위한 말 같다.

대학 신입생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의대 열풍을 실감할 수 있다. 주로 1, 2학년에 배정된 교양 수업보다 1학년 때부터 전공수업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부쩍 늘었다. 이미 중·고교 시절 진로를 충분히 탐색하고 결정해 해당 학과에 입학했으니 더 이상의 탐색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적성 위주 진로지도 취지 퇴색
안정적 직업 ‘의대 쏠림’ 부추겨
대학에서도 전공 바꿀 수 있어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중·고교에서 진로 탐색이 진로 교육의 목적일 텐데 이미 답을 정해서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이 대학 입시의 다수를 차지하고, 2016년 자유학기제 전면 도입 이후 본격화한 진로 지도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의대 광풍도 ‘최상위권=의사’라는 진로 지도의 정답이 불러온 결과다.

이미 진로를 결정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 자신의 선택이 예상과 다르다는 현실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제한된 정보로 학과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름 꿈꾸고 자기 진로라고 생각해서 진학한 대학의 전공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를 때 느끼는 실망감은 매우 크다. 그래서 다른 전공을 탐색하고 활로를 찾게 된다.

그동안 대학이 많이 달라져서 이런 상황을 수용하고 반영한다. 부전공은 옛말이고 복수전공은 기본이다. 정부 지원으로 본격화한 각종 비교과 프로그램을 통해서 직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제공한다. 대학 입학 당시의 학과와 전혀 다른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대학은 유연한데 대학의 이런 변화가 중·고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학 교육이나 노동 시장의 변화에 둔감한 것이 요즘의 자유학기제와 중·고교 진로교육 프로그램이다. 내용을 보면 취미 수준의 탐색인 경우가 많다. 진로 체험 자체가 학생들의 흥미나 재미 위주로 구성되기 때문에 쉬운 프로그램 위주로 구성된다. 취미와 직업의 개념을 혼용해 이뤄지는 프로그램이 다반사다. 사회·경제적 자원이 적은 지역일수록 더 심해진다. 외부 강사에 의존하다 보니 학생들의 희망보다는 섭외한 강사에게 학교 프로그램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한국고용정보원의 한국 직업 사전에 등록된 직업만 1만7000여개로 다양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담당할 수 있는 건 매우 제한적이다. 게다가 10대 초반 청소년에게 인생에서 두세 번은 바뀔 수 있는 직업을 결정짓게 하는 건 어른들의 과도한 기대를 넘어선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진로 체험이 체험 활동으로 바뀐 학교를 보내는 부모는 오히려 불안한 마음에 중1 때부터 학원으로 자녀를 보낸다. 자유학기제 이후 사교육비 지출이 늘어난 이유다. 안정된 전문직이라 여겨지는 교직에 종사하는 교사들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자기 경험에 근거해 직업 안정성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보장되는 직업을 권하게 된다.

대학 졸업 이후 계속 경쟁을 해야 하는 전공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안정성을 선호하는 부모의 선호도 다르지 않다. 정부와 기업이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 반도체 학과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문·이과 통합 수능 이후 성적 우수 학생들이 이과로 대거 몰리면서 이런 쏠림 현상은 더 심해졌다.

중·고교에서 외부 강사와 시설에 의존하는 자유학기제와 진로 지도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 지난해 신입생이 자유학기제 첫해이고, 의대 쏠림이라는 미증유 사태는 자유학기제가 당초 의도와 달리 표류했다는 증거다.

다양한 진로 탐색이 오히려 안정적 직업에 대한 다수의 선호를 초래했고, 흥미와 적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학습하게 됐다. 중 1학년에게 진로 선택을 하게 하는 것도, 성적이 우수한 고3 수험생에게 의대라는 선택지밖에 보이지 않게 만든 것도 어른들 때문이다. 이제는 책임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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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