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혁신적 은행’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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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이런 걸 두고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미국 서부의 낯선 지역은행 하나가 불과 일주일새 전혀 다른 관점에서 금융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한번은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한 혁신 사례로, 또 한 번은 절대 따라가지 말아야 할 위험 사례로 말이다.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세계 금융시장에 연쇄 파문을 몰고 온 실리콘밸리뱅크(SVB)가 문제의 주인공이다.

금융당국이 처음 이 은행을 언급한 건 이달 2일 열린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에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 과점체제를 깰 ‘특단의 대책’을 주문한 뒤 꾸려진 TF다. 이날 회의에선 소규모 특화은행을 새로 투입하는 방안이 제시됐는데, 그 대표 사례로 언급된 게 SVB였다.

혁신 사례라던 미 SVB의 파산에
특화은행 도입 논의 사그라들어
과속 대신 실질 경쟁 촉진 방안을

SVB는 실리콘밸리의 벤처 특화형 은행이다. 쓸만한 스타트업을 선별해 자금을 대고, 이 기업이 성장하며 번 돈을 다시 예금으로 받는다. 경영 역량이 부족한 기업에는 컨설팅 등 맞춤형 서비스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벤처 생태계를 떠받치는 작지만 혁신적인 은행으로 국내에도 알려졌다. 금융당국의 눈에도 충분히 신선해 보였을 법하다. 별다른 경쟁 없이 고신용 가계와 기업을 상대로 ‘이자 장사’에만 몰두하는 국내 대형 은행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TF 회의 뒤 국내에도 특화은행 도입이 검토되고 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곧 반전이 벌어졌다. 10일(현지시간) SVB가 전격 폐쇄돼 파산 절차에 들어가면서다. 뱅크런으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지 불과 36시간 만에 두 손을 든 것이다. 사태의 진상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이 은행의 적나라한 민낯도 드러났다. 화근은 저금리 시절 수익을 찾아 벤처와 증시로 물밀 듯이 들어온 투자 자금이었다. 벼락부자가 된 기업가들은 뭉텅이 돈을 SVB에 예치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았던 탓에 은행은 채권을 대규모로 사들였다.

재앙이 싹트기 시작한 건 유동성 잔치가 막을 내리면서다.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히 금리를 올리면서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값은 뚝뚝 떨어졌다. 돈줄 죄기에 자금이 마른 벤처기업들도 은행에 맡긴 돈을 찾기 시작했다. 커지는 위험을 방치하던 SVB는 결국 예금을 내주기 위해 헐값에 채권을 던져야 했다. 곧 은행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는 소문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삽시간에 벤처 커뮤니티에 퍼졌고, 순식간에 파국이 닥쳤다. 안이함과 자만, 감독 부실에 불운이 겹친 셈이다. 특정 업종과 지역에 집중된 은행의 기반 역시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대공황 때나 벌어졌던 뱅크런이 현실에서 재현되자 전 세계엔 비상이 걸렸다. 흥미로운 건 우리 금융당국의 반응이다. “국내 금융시장과 은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일찌감치 선을 긋고 나섰다. 국내 은행의 운영방식이 SVB와 다르다는 게 주요 근거다. 예금으로 받은 돈을 투자하는 대신 비교적 안전한 대출로 굴리니, 손실을 볼 여지도 작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대마진을 쫓는 ‘이자장사’에 주력한 덕에 위험을 피해갈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비단 우리 당국만의 해석이 아니다. 스탠다드앤푸어스(S&P)도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태 지역 은행들은 서구와 비교해 ‘재래식(conventional) 사업 모델’에 가까워 비교적 안전하다는 평가를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진단이다.

15일 다시 열린 금융당국 TF 회의에서도 SVB는 소환됐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TF는 금융안정과 소비자 보호를 전제로 은행권에 경쟁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번 사태로 특화은행 논의 자체가 영향받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당국 안팎의 분위기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SVB는 시작이었을 뿐 크레디트스위스가 간판을 내린 데 이어 도이체방크까지 흔들리면서다. 모두 국내 금융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글로벌 투자은행들이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당장 구조개편 논의가 추진력을 얻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강공에 코너로 몰리던 은행권에선 “한숨 돌렸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방법론의 차이일 뿐 정체된 금융권에 경쟁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건 컨센서스다. 당장 눈에 띄는 결과물을 내겠다며 과속하는 대신 실질적 경쟁을 촉진할 방안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 가야 한다. 혁신에 늘 따르기 마련인 위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관리할 것인지, 그러기 위해선 감독 당국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도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