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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작가들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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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해 7월 웹툰업계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글로벌 흥행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작화를 담당하던 장성락 작가의 사망 소식이었다. 지병이 있었다지만 서른일곱 청년의 갑작스러운 죽음. 웹툰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이목이 쏠렸다. 산업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작가들이 소모품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수술 때문에 연재를 쉬겠다는 작가에게 “휴재하면 매출이 떨어져서 곤란하다”는 제작사와 플랫폼, 외국에서는 격주나 한 달 걸리는 분량을 일주일에 해치우는 초인적 관행, 1년에 수억원 버는 스타작가들의 이면에 최저임금 수준도 받지 못하는 작가가 태반인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고 이우영 작가가 그림을 그린 극장판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고 이우영 작가가 그림을 그린 극장판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장 작가의 죽음이 준 충격은 지난 2월 웹툰을 포함한 만화 분야에 표준계약서 사용 권고를 골자로 하는 만화진흥법 개정안 국회 통과로 이어졌다. 표준계약서가 강제력은 없지만, 작가들의 권리 확대에 제도적 길이 열린 셈이다. 문체부는 창작자들이 요구해 온 휴재권 보장과 회차별 컷 분량 제한 조항 등이 포함된 새로운 웹툰 표준계약서 초안을 준비 중이다.

한류강국 위상 못 미치는 후진성 #목숨잃는 작가들의 비극 이어져 #창작자가 존중받는 생태계 시급 #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다. 인기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의 그림을 그린 이우영 작가다. 15년 전 제작사와 맺은 불공정 계약으로, 원작자인데도 저작권 침해로 고소당해 고통받다가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원작자임에도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자신의 다른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부모님 농장에서 ‘검정고무신’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법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사업화를 제안하는 회사만 믿고 저작권 지분을 넘기는 갑질 독소조항에 사인한 게 평생의 족쇄가 됐다.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회사가 77개 부가사업을 벌이는 동안 작가가 수익 배분받은 돈은 1200만원 정도”였다. 1960, 70년대 원작 배경을 현재로 바꿔 새 버전을 내고 싶다는 작가의 창작 의지조차 회사는 꺾어버렸다. 안타까운 선택을 하기 며칠 전 작가는 아내에게 “사람이 죽어야 이슈가 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검정고무신’에 앞서 불공정 계약의 원조로 꼽히는 그림책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작가에게 저작권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을 지키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백 작가는 2004년 ‘구름빵’ 출간 당시 1850만원을 받고 저작권 등 모든 권리를 출판사에 양도하는 ‘매절 계약’을 했고, 이후 ‘구름빵’은 애니메이션ㆍ뮤지컬 등으로 수천억원대의 부가가치를 올렸다. 작가는 저작권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이후 창작자가 유통업자 등에게 공정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구름빵 보호법’이 여러 건 발의됐으나 흐지부지됐다. 백 작가는 “정부가 이번에도 실태점검을 하겠다고 하는데 ‘구름빵’이 이슈됐던 10년 전과 똑같은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1년 30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아사한 이후 프리랜서 창작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는 예술인복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장성락 작가의 죽음이 표준계약서를 장려하는 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이제 이우영 작가의 죽음이 창작자가 존중받는 공정하고 선진적인 저작권 시스템 정비로 이어진다면 그나마 헛되지 않은 죽음이 될까. 한류 강국 대한민국이 아직도 콘텐트산업 생태계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상징적 사건이 바로 이들 작가의 죽음이다.

현재 국회에는 저작물의 수익이 계약 당시보다 현저히 많은 경우 창작자가 추가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문체부는 불공정 계약 방지를 위해 ‘저작권 법률지원 센터’ 구축 TF를 발족시켰고,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에 2차적 저작물 작성권 관련 내용을 넣겠다고 밝혔다. 과거 문체부는 “지난 8년 동안 온갖 이유를 대며 저작권법 개정 운동을 사실상 막았다”(하신아 웹툰작가노조 위원장)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진짜 달라질지, 더 이상 ‘희망고문’은 없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