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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인기없는 일도 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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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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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엘리트 출신의 대통령이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의회 동의를 건너뛰는 극약 처방을 동원해 가까스로 일은 성사시켰지만, 야당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이 더욱 거세게 불타오른다.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했다. 대통령이 정치적으론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마크롱, 연금개혁으로 뭇매 맞아 #“여론보다 국가이익 선택하겠다” #윤석열은 한국의 마크롱이 될까

최근 한·일 정상회담 뒤에 야권의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을 연상한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은 최근 연금개혁에 성공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처지다.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들이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정부의 연금개혁안엔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들이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정부의 연금개혁안엔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랑스는 은퇴자의 낙원이다. 연금소득이 두둑해서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무려 70%가 넘는다. 은퇴한 뒤에 연금으로 가족들과 여행을 가고, 여유롭게 취미생활도 즐기면서 안락한 여생을 보내는 게 모든 프랑스인들의 로망이다. 풍요한 은퇴문화가 프랑스의 국가정체성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런데 마크롱은 연금개혁을 들고 나와 이런 국민 정서에 정면 도전장을 던졌다.

마크롱이 연금개혁을 설파한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우리가 더 오래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일할 필요가 있다”(올해 신년연설)는 것이다. 프랑스는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면서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20.8%에 달하는 초고령화 사회가 됐다. 이대로 놔두면 당연히 연금재정이 펑크가 난다. 프랑스 연금재정은 올해부터 적자(18억 유로, 약 2조5000억원)로 돌아서는데 2030년엔 135억 유로(약 19조원), 2050년엔 439억 유로(약 61조원)로 적자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에 마크롱은 지난 1월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연장하고, 연금을 100% 받을 수 있는 기여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연장하는 시기를 2035년에게 2027년으로 앞당기는 연금개혁안을 발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서 가진 TV 인터뷰에서 "더 기다릴수록 연금 재정이 악화되기 때문에 연금 개혁은 필요하다. 나도 이런 일을 안 했으면 좋았겠지만 연금개혁안을 시행하는 건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마크롱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서 가진 TV 인터뷰에서 "더 기다릴수록 연금 재정이 악화되기 때문에 연금 개혁은 필요하다. 나도 이런 일을 안 했으면 좋았겠지만 연금개혁안을 시행하는 건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얼핏 보면 큰 손질도 아닌 것 같은데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국민 정서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대부분의 노조가 연금개혁안에 반발해 연대파업에 나섰고, 대학생들은 거리에서 거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철도·지하철·항공이 마비되고 거리는 온통 쓰레기로 뒤덮혔다. 은행·병원·학교 노조까지 파업에 들어갔고, 일부 발전소까지 가동을 멈췄다. 지난 7일의 시위엔 참가자가 120만 명을 넘어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마크롱은 이미 2019년에도 연금개혁을 시도하다 ‘노란조끼’ 시위에 막혀 좌절한 경험이 있다.

이번엔 달랐다. 개혁안이 상원은 통과했지만 하원에서 부결될 기미가 보이자 마크롱은 헌법 49조 3항의 ‘정부 단독입법권’을 발동하는 배수진을 쳤다. 정부가 의회 승인 없이 법을 제정하되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투표를 실시하는 제도다.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해당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법안이 부결되는 건 물론이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 이른바 ‘묻고 더블로 간’ 셈인데 이게 적중했다. 지난 20일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9표 차로 가까스로 부결되면서 연금개혁안이 통과된 것이다.

마크롱은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면 연금개혁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후임자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지도자의 결단은 원래 고독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뭇매를 맞고 있지만 먼 훗날엔 프랑스 연금의 구세주로 평가받을지 모른다. 그는 지난 22일 TV에 나와 “단기적인 여론조사 결과와 국가의 일반적인 이익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며 “연금개혁으로 떨어진 인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1월 발표한 국민연금 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으로, 5년 전 추계보다 2년 앞당겨졌다.  [중앙포토]

정부가 지난 1월 발표한 국민연금 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으로, 5년 전 추계보다 2년 앞당겨졌다. [중앙포토]

프랑스의 출산율은 1.8이고 한국은 0.78이다. 연금개혁의 시급성은 프랑스보다 한국이 작지 않다. 그런데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연금개혁은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임기 5년 동안 손을 놨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의 마크롱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