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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승려들 '생계형 버스킹'…기녀 무리 마주친 그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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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산길에서 승려 무리와 기녀 무리가 마주쳤다. 승려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기녀들을 흘긋 쳐다본다. 시주를 권하며 허리를 굽히는 승려도 보인다.

기녀들은 머리에 뒤집어쓴 장옷 고름을 매만지며 시선을 피한다. 시주하라는 승려를 매몰차게 외면하기도, 그렇다고 선뜻 돈을 건네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이때 기녀들의 '왕언니' 격인 한 여인이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진다. 귀찮은 일을 해치워버리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신윤복의 '노상탁발'은 기녀들을 상대로 길동냥을 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통해 불교가 힘을 잃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신윤복의 '노상탁발'은 기녀들을 상대로 길동냥을 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통해 불교가 힘을 잃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노상탁발'이라는 제목의 신윤복 그림에서는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함) 정책이 바꿔 놓은 저잣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길거리 탁발에 나선 승려 무리다. 행인들에게 시주를 부탁하기 위해 목탁과 꽹과리를 든 승려들은 요즘 말로 하면 '생계형 버스커'다.

지난달 22일 출간된『조선 미술관』(블랙피쉬)은 조선 시대 풍속화와 궁중 기록화를 통해 조선의 생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조선 후기 왕실과 상류 사회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고미술 해설가인 저자 탁현규는 신윤복, 정선,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의 천재 화가 7인의 작품과 숙종과 영조 시기 기록 화첩 등 그림 50여 점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맛깔나게 소개한다.
『조선 미술관』은 출시 직후 교보문고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서양 미술이 아닌 전통 미술, 그것도 고미술을 다룬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조선미술관

조선미술관

저자는 "그림은 사진이 도입되기 전부터 시대를 읽어내는 중요한 단서이자 좋은 사료였다"고 강조한다. 일례로 신윤복의 그림은 조선 시대 의복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다.
저자는 책에 실을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그림들을 선정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림 속에 조선인을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림 속 주인공이 중국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17세기에 접어들며 그림 속 중국 물소가 조선의 황소로, 중국 나무꾼이 쓰던 멜대가 조선 나무꾼 고유의 지게로 바뀌었고 진짜 조선의 풍경이 담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신분을 추측해보는 것도 고미술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다. 저자의 그림 해설에 따르면 조선 후기 사대부 남성들은 사방관, 탕건, 낙천건 등 여러 종류의 관(모자)을 썼는데, 갓과 복건을 함께 쓰는 등 모자를 이중으로 쓰는 유행을 즐기기도 했다.
평민 이하 남성이 단출한 패랭이를 쓴 모습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사대부 여성들은 외출 시 어여머리에 너울을 썼고, 과부들은 머리 위에 개두라는 머리 덮개를 착용했다.

숙종 시기 도화서 화원들이 연회를 즐기는 관료들의 모습을 그린 '기사사연도'는 세밀한 묘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림 속 인물들이 가슴에 두른 띠로 서열을 표시했다. 정1품은 무소 뿔로 만든 허리띠를, 정2품은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둘렀다.

이처럼 저자는 그림 구석구석에 있는 소품과 미물에 담긴 의미까지 분석하며 독자를 조선 시대로 이끈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세심한 편집은 텍스트 설명과 그림을 매치하며 읽어야 하는 독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궁궐 안팎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절의 드라마는 풍속화, 다큐멘터리는 기록화였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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