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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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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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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제 개편 방안을 내놓고 고용노동부가 동네북이 됐다. 여론이 들끓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보완을 지시했고, 16일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가이드라인이 나왔다. 엊그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정책 발표 전에 여당·대통령실과 충분하게 논의하라며 노동부를 힐난했다.

국민을 앞에 두고 굿캅, 배드캅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웃기는 정책 혼선인가. 노동부로선 억울한 일이다. 근로시간제 개선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슈가 아니다. 근로시간 유연화와 근로자 선택권 보장은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고,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도 올라 있다. 노동부 장관이 지난해 6월 노동시장 개편 추진 방향을 발표할 때도 이미 골자는 들어 있었다.

근로시간 개편은 뚝심 있게 추진을
휴가 불만, 직장민주화 계기로 삼길
좌초하면 더 어려운 개혁들 힘들어

노동부는 지난해 7월 전문가 논의기구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시작했고, 그해 12월 연구회의 권고문이 나왔다. 지난 6일 노동부의 근로시간제 개편 발표는 연구회 권고를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대통령실이 노동부의 정책 추진 현황을 몰랐을 리 없다.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청년층 의견 수렴을 지시한 대통령을 향해 정의당 대변인이 촌철살인을 날렸다. “중국집 사장이 짜장면을 처음 보는 것처럼 굴고 있다.” 노동부 공무원들이 ‘사이다 발언’이라고 속으로 손뼉을 쳤을 것이다.

지난해 6월 이후 관련된 노동부 자료를 죽 훑어봤다.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1953년 제정 후 큰 변화 없이 70년간 유지된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낡은 노동 제도를 고치자는 거다. “현행 근로시간 제도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전통적인 공장형 노동 과정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기술혁신과 디지털 혁명, 일하는 방식과 생활세계의 변화 등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다.”(연구회 권고문)

2018년 여야 합의로 도입한 주 52시간제를 되돌리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 맞게 보완하는 내용이다. 주 52시간제를 회피하려고 근로시간을 노사 합의로 미리 퉁쳐서 정하는 포괄근로제 같은 편법과 이로 인한 공짜 노동은 막자는 취지다. 그런데도 여론의 반대가 심했던 건 최대 ‘주 69시간’까지 장기간 근로하게 된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는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도 지적했듯이 “아주 극단적인 프레임”이다. 연구회 좌장을 맡았던 권순원 숙대 교수는 “현행 제도도 극한 사례로 치면 주 최대 129시간까지 근무가 가능하다”고 했다. 총근로시간 안에서 근로자가 자유롭게 근로시간을 결정하는 한 달 선택근로제를 주 6일 했을 때 나오는 숫자다.

연장근로시간 단위를 바꾸려면 근로자 대표의 서면 합의와 근로자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노조가 반대하면 도입될 수 없다. MZ노조를 포함해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은 14%다. 노조 없는 나머지 86% 근로자의 진정성 있는 의사를 근로자대표 선출 등에서 제대로 반영하는 게 관건이다. 있는 연차도 제대로 못 쓰는데 ‘제주도 한 달 살기’ 같은 장기휴가가 웬 말이냐는 청년들의 불만은 일리가 있다. 일손이 달리는데 휴가 가면 동료에게 부담이 되고, 연차 대신 임금으로 보상받고 싶어 연차를 덜 쓰는 경우도 있다.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직장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회를 직장 민주화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일터의 불공정한 관행과 싸우고 있는 ‘직장갑질119’ 같은 진보단체와 정부가 협력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근로시간 개편은 야당을 설득해 법을 고쳐야 한다. 국민이 당장 체감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노동개혁을 선언한 정부라면 응당 가야 할 방향이다. 개선책의 큰 틀을 허물지 말고 뚝심 있게 밀어붙여야 한다.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라는 노동개혁 과제뿐 아니라 국민연금 개혁, 의대 정원 확대 등 더 어려운 국정 과제가 산적해 있다. 오해를 풀고 설득하면 될 근로시간 개편조차 좌초한다면 나머지 더 어려운 개혁은 볼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