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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그래, 지옥은 내가 가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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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오는 26일 서거 113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와 최근 타계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그 둘은 동아시아가 평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호소했다.

오는 26일 서거 113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와 최근 타계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그 둘은 동아시아가 평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호소했다.

지난 13일 뒤늦게 부고 소식이 들려온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요즘 말로 ‘학폭’의 희생자였다. 가해자는 교장선생님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극성일 때 초등생인 오에는 날이면 날마다 교장의 매질을 견뎌야 했다. 그때 소년은 결심했다. 언젠가는 그런 어린이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일본의 사죄 말한 오에 겐자부로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와 통해
한·일의 미래, 멀지만 가야 할 길

 소년은 왜 매를 맞았을까. 지금 돌아보면 터무니없다. 당시 학교에선 매일 조례(朝禮)가 열렸는데, 교장선생님은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천황 폐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물었다. 대답은 하나였다. “죽겠습니다. 할복해서 죽겠습니다.” 소년 오에는 머뭇거렸다. 작은 시골에 사는 그를 천황이 알고 계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가 주저하는 사이 격노한 선생님은 매를 들었다.

 2006년 5월 고려대를 방문한 오에가 ‘나의 문학과 지난 60년’ 강연에서 공개한 일화다. 초등생에게도 충성과 희생을 강요한 일본 군국주의의 한 단면이다. 개인을 삭제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반추하게 된다. 일본인도 이랬는데 하물며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는 어땠을까.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고 비판해 온 오에의 진심을 알 것 같다.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의 17년 전 강연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역시 태평양전쟁 때였다. 어머니가 『허클베리핀의 모험』 헌책을 사주셨는데, 작가가 미국인 마크 트웨인이었다. 미국과 교전 중이라 미국 책을 읽으면 매 맞기 십상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꾀를 냈다. 마크 트웨인은 독일인이고 필명만 기억하기 쉽게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실제로 오에는 교장선생님에게 붙들려갔는데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했더니 “옳지, 잘 알고 있구나”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동맹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의 얘기처럼 들린다.

 오에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 일생의 화두를 얻었다. ‘그래, 지옥은 내가 가겠다(All right, then, I’ll go to hell)’다. 소설에서 ‘불량소년’ 헉이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을 밀고하지 않고 차라리 지옥이나 가겠다고 결단하는 대목이다. 기존의 비틀린 도덕과 법률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으로, 오에는 이 말을 자신의 문학과 사회활동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오에가 2004년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9조의 모임’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동아시아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한·중·일 3국의 화해를 모색하려고 했다. 물론 그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부터 요구했다. 노년까지도 반전 시위에 나서며 일본의 우경화를 염려했다. 비록 일본 사회의 물줄기를 돌리지 못했지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9조의 모임’의 목적은 크게 보면 한·중·일의 공존을 희구한 안중근 의사와도 연결된다. 일본 정치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일본의 전후 반전사상을 안중근과 연동시켰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일본국 헌법 9조로 이어지는 사상 수맥을 발견했을 때 몸이 떨려오는 체험을 했다”고 했다. 오는 26일은 안 의사 서거 113돌. 오에와 안 의사의 교집합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한·일 관계 정상화에 시동이 걸렸다. 정치·경제·안보협력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다. 반면에 후폭풍이 거세다. 굴욕외교 논란도 있다. 특히 일본은 과거사에 관한 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마음의 교류까지는 갈 길이 멀다.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윤 대통령이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결기로 앞길을 뚫어낼지 주목한다.

 윤 대통령은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참에 안 의사 저술 원본이나 유해 자료 발굴 협조를 일본에 요청하면 어떨까. 마침 보훈처도 보훈부로 승격을 앞두고 있다. 신간 『유해 사료, 안중근을 찾아서』(김월배 편저)를 보면서 든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