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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비 근절 그후…타워크레인 기사도 건설업체도 다 난리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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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월례비 근절” 그후 현장에선

 지난 8일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선 타워크레인 기사들과 건설업체의 눈치 싸움이 한창이었다. 정부의 ‘건폭(건설현장 폭력행위)’ 단속 이후 민주노총이 “월례비 근절에 동의한다”며 “그동안 월례비를 받는 대가로 해줬던 주 52시간 이상 초과 근무와 위험 작업을 거부하라”는 방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95% 이상이 양대 노총에 가입돼 있다. 현장에서 만난 타워크레인 기사 전모(43)씨는 “타워크레인의 운전 중지 기준은 풍속 15m/s인데, 송도는 바닷가라 이를 넘는 일이 다반사”라며 “월례비를 받는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해왔는데, 이제는 일부 기사가 ‘중지 기준을 지킨다’는 이유로 (정부와 업체가) 태업이라고 욕하니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8일 인천 미추홀구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 타워크레인을 감독하는 신호수와 타워크레인 후크에 자재를 거는 줄걸이 작업자가 따로 배치되어 있다. 6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이영훈(34)씨는 ″평소에는 신호수와 줄걸이 작업자가 함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8일 인천 미추홀구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 타워크레인을 감독하는 신호수와 타워크레인 후크에 자재를 거는 줄걸이 작업자가 따로 배치되어 있다. 6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이영훈(34)씨는 ″평소에는 신호수와 줄걸이 작업자가 함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주 52시간 초과 근무를 거부하면서 전날 인천 미추홀구의 다른 현장에선 안전사고도 일어났다. 날씨가 풀리며 공사 일정이 바빠진 탓에 타워크레인 대신 차량 크레인을 불러다 공사를 계속했는데, 차량 크레인이 구조물을 들어올리던 중 철제 부속품이 튀어 작업자가 큰 부상을 입었다. 30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조모(56)씨는 “현장 소장은 무조건 할 일이 있다고 하는데, 우린 (노조 방침상) 시간 외 근무가 안 되니까 서로 짜증나고 불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이 모양이 다른 철근을 들어 올리고 있다. 김홍범 기자

지난 8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이 모양이 다른 철근을 들어 올리고 있다. 김홍범 기자

 같은 날 찾은 경기도 파주 운정지구의 아파트 공사현장도 불안감이 감돌긴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초과 근무를 거부하면서 곳곳에 옮기지 못한 자재들이 쌓여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소장 A씨는 “자재 이동의 70~80%를 도맡는 타워크레인이 빠지면 현장이 멈춘다”며 “현찰·차명계좌 등으로 돈을 주기로 하고 어제(7일) 오후부터 간신히 작업을 정상화시켰다”고 말했다. 월례비나 다를 바 없는 ‘급행료’를 지불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취지다. 하도급사 대표 B씨는 “12개 현장의 연간 순이익이 약 30억원인데, 월례비로만 25억원이 나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한 공사현장의 타워크레인들. 김정민 기자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한 공사현장의 타워크레인들. 김정민 기자

월례비가 뭐길래

 건설현장의 관행인 타워크레인 월례비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가 ‘건폭’ 단속의 제1과제로 월례비 근절을 내세우긴 했지만, 건설현장은 물론 정부에서도 “월례비는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월례비는 지난 수십 년간 건설사가 타워크레인 기사에게 월급 외에 건네온 비공식적인 웃돈이다. 10~20년 전까진 담뱃값·떡값처럼 오가던 소액의 수고비였지만, 지금은 인당 월 500만~600만원 정도로 금액이 커졌다. 이를 두고 기사들은 업체가 공사를 서두르고자 타워크레인을 자주, 위험하게 쓰기 위해 선지급하는 ‘앞돈’, 업체는 타워크레인 없이 공사 진행이 불가능한 점을 이용해 노조가 요구하는 ‘뒷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토부 “58.7%” 경찰 “최대 18.9%”…차이 왜

타워크레인 월례비 관련 불법행위 차이. 그래픽=남윤우 인턴

타워크레인 월례비 관련 불법행위 차이. 그래픽=남윤우 인턴

 국토교통부는 앞선 1월, 1494곳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불법행위 2070건 중 월례비 요구가 1215건(58.7%)으로 가장 심각하다고 발표했다. 지난 3년간 118개 건설사가 지출한 월례비와 노조 전임비 등이 1686억원이라고도 밝혔다. 원희룡 장관은 “월례비를 받거나 태업하는 기사들은 최대 1년간 면허정지 행정처분을 내리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찰청이 지난 9일 발표한 건폭 특별단속 중간(3개월) 결과에 따르면 타워크레인 월례비를 요구했다가 구속된 사례는 ‘0건’이었다. 전체 단속 581건 중 타워크레인 관련 사건도 110건(18.9%)에 그쳤다. 최근 경찰 조사를 받은 7년차 인천 타워크레인 기사 이모(34)씨는 “관행에 따라 건설사가 준 돈을 받았을 뿐인데 피의자가 됐다. 도매금 ‘깡패’ 취급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월례비 자체는 노사 문제”라며 “경찰은 월례비 요구 과정에서 협박·강요 등 명확한 불법행위가 있었는지만 수사한다”고 말했다. 기사 20여 명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월례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공갈·갈취 혐의를 입증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 타워크레인 기사 이모(34)씨에게 지난달 초 날아온 경찰 출석요구서. 지난 7일 경찰서에 다녀온 이씨는 “2016년부터 6개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한번도 월례비를 직접 요구한 적 없다”며 “그런데 갈취 혐의라니 억울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사진 이씨 제공

인천 타워크레인 기사 이모(34)씨에게 지난달 초 날아온 경찰 출석요구서. 지난 7일 경찰서에 다녀온 이씨는 “2016년부터 6개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한번도 월례비를 직접 요구한 적 없다”며 “그런데 갈취 혐의라니 억울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사진 이씨 제공

‘뜨거운 감자’ 된 월례비…현장 해석은 제각각

 월례비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정부와 법원, 업체와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모두 제각각이다. 광주고등법원은 지난달 16일 D건설 부당이득금 반환소송 2심에서 월례비를 임금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건설사와 기사들 간 월례비를 증여키로 한 ‘묵시적 계약’이 성립했다” “월례비는 수십 년간 지속된 관행으로 사실상 임금의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월례비를 두고 정부는 ‘부당금품’, 법원은 ‘임금’으로 풀이한 것이다.

건설현장의 인식도 ‘폭력행위’라는 국토부와는 온도 차가 있었다. 6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이영훈(34)씨는 “현장 기사들 대부분 월례비는 업체가 주는 인센티브(성과급)라고 생각한다”며 “공사기간과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초과노동이나 안전규정 위반 작업을 시키는 대가”라고 말했다. 2019년 월례비 지급중지 운동을 주도했던 김학노 철근콘크리트 서울·경기·인천 사용자연합회 대표는 “당시 지급중지 운동은 3개월 만에 실패했다. 공사 기간을 맞추기 위해 뒷돈을 주고 일을 진행시킨 업체들이 많았다”며 “제도 개선 없이는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타워크레인 관리를 하청에 전가하는 원청의 불공정행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타워크레인 월례비 논란 일지. 그래픽=남윤우 인턴

타워크레인 월례비 논란 일지. 그래픽=남윤우 인턴

정부·여당도 “타깃 애매”…전문가들 “단속이 해법 아냐”

 이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한 탓에 정부·여당 일각에서도 속도조절론이 나온다. 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월례비를 아예 임금으로 보는 해석에 동의할 순 없지만, 급행료 성격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다각도로 현장 정보를 취합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관계자는 “안 건드릴 수 없지만 건드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라며 “월례비는 메인 타깃 삼기 애매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단속 일변도는 월례비 갈등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최영기 한림대 경영학과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는 “공사기간 단축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월례비가 생긴 건데, 한쪽(기사)만 범죄화한다고 없어질 만큼 시장이 어수룩하지 않다”며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려면 기사, 노조, 원청, 하청 간 대화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김세정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기사들은 실제 업무지시를 내리는 현장 하청업체가 ‘웃돈’을 대가로 시키는 일을 마다하기 어렵다”며 “잘못된 업무지시를 한 건설사 책임은 외면하고 기사들만 때려잡는 상황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도 “정책의 근본적인 취지가 ‘언더 머니(under money)’를 없애는 것이라면 과한 단속만이 정답이 아니다”라며 “적정 가격을 임금 계약서에 녹이는 등 관행을 양지로 끌어오려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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