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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제목도 없는' 내용증명…LG 상속분쟁 시작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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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12년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앞줄 왼쪽 셋째)의 미수연(米壽宴·88세)에 LG그룹 오너 일가가 참석한 모습. 앞줄 왼쪽부터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과 부인 김영식 여사, 구자경 명예회장,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와 남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 뒷줄 왼쪽 둘째부터 구본준 LX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사진 LG그룹

2012년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앞줄 왼쪽 셋째)의 미수연(米壽宴·88세)에 LG그룹 오너 일가가 참석한 모습. 앞줄 왼쪽부터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과 부인 김영식 여사, 구자경 명예회장,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와 남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 뒷줄 왼쪽 둘째부터 구본준 LX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사진 LG그룹

 LG그룹에서 불거진 오너 일가 간 상속 분쟁을 두고 재계 안팎에선 뜻밖이란 반응이 나온다. 특유의 ‘인화(人和)’를 강조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비교적 무난하게 경영권 승계 과정을 밟아왔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기업에서 벌어진 초유의 사태여서다. 법정 공방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 4위 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온다.

12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LG그룹 오너 일가 사이에 균열이 나타난 건 지난해부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해 7월 구 회장의 어머니 김영식 여사, 여동생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와 구연수씨 측으로부터 첫 내용증명 서류를 받았다. 법률 대리인도 지정하지 않았고, 제목도 없는 내용증명이었다. 김 여사 측은 법정 상속비율(배우자 1.5 대 자녀 1인당 1)에 따라 상속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다른 요구사항이 있으면 고려하겠다는 뜻은 전했다고 한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맨 왼쪽), 구광모 LG그룹 회장(가운데),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사진 LG그룹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맨 왼쪽), 구광모 LG그룹 회장(가운데),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사진 LG그룹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후 상속세 납부 과정에서도 이상 조짐이 나타났다. LG 사정에 밝은 재계 관계자는 “고(故) 구본무 선대회장이 2018년 별세한 후 상속인들은 상속세를 5년 동안 6회에 걸쳐 나눠 내기로 했는데 5회차인 지난해 11월 구 대표 측이 세금을 납부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며 “당시 구 회장이 연체를 막기 위해 (상속세를) 대납했다”고 말했다. 재계는 이를 계기로 유산 다툼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여사 측은 올 초 2회에 걸쳐 다시 내용증명 서류를 보냈고, 구 회장 측이 이에 답한 지 2주 정도 뒤인 지난달 28일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LG 측은 세 모녀의 소송 제기에 “그룹의 전통과 경영권을 흔드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LG가(家)는 ‘장자(長子) 승계’ 원칙에 따라 여성 구성원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지난해 4월 구연경 대표가 LG복지재단 대표에 올랐을 때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구 선대회장 별세 후에도 그동안 가족 간 문제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고 “구 대표가 복지재단을 맡은 것도 구 회장이 (구 대표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것을 감안해 제안한 것"이라고 전했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가 2013년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에 참석한 모습. 사진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가 2013년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에 참석한 모습. 사진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이사(왼쪽)가 지난해 8월 '저신장아동 성장호르몬제 기증식'에서 어린이에게 기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LG그룹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이사(왼쪽)가 지난해 8월 '저신장아동 성장호르몬제 기증식'에서 어린이에게 기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LG그룹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세 모녀의 요구대로 법정 상속비율에 따라 구 선대회장이 남긴 ㈜LG의 지분 11.28%를 재분배할 경우 구 회장 9.71%(구자경 명예회장 상속분 포함), 김 여사 7.96%, 구 대표 3.42%, 연수씨 2.72%(별도 매입분 포함)로 세 모녀의 합산 지분율이 14.1%로 구 회장 몫을 뛰어넘는다. 구 회장을 포함한 ㈜LG의 특수관계인 지분은 41.7%로, 김 여사 측 지분의 향배에 따라 경영권 분쟁 이슈로 확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김 여사 측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로고스는 이에 대해 “경영권 분쟁이 아니라 상속 절차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내놓고 있다.
일각에선 구 대표의 남편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가 이번 소송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세 모녀와 윤 대표는 구 선대회장이 살던 서울 한남동 주택에서 함께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벤처캐피털 블루런벤처스의 창업 파트너 중 한 명이다. 최근 투자에 참여했던 그린랩스 등 포트폴리오 기업의 경영 악화로 윤 대표 측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이번 소송이 윤 대표의 자금난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불거졌다. 하지만 한 재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윤 대표가 소송에 관여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처가와 거리두기를 하는 것으로 안다”고 반박했다. 블루런 측은 “윤 대표는 현재 해외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뒤늦게 소송이 불거진 것을 두고는 재계에선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별세 시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구 명예회장은 구 선대회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12월 별세했다. 세 모녀가 상속 과정에 불만이 있었더라도 구 명예회장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전통을 거스르는 소송을 하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재계 관계자는 “구본준 회장은 LG그룹에 기여도가 높았음에도 LX로 계열 분리를 했다”며 “LG 오너가에서 집안의 전통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모녀가 구 선대회장의 유언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고서 소송에 나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 여사 측은 “(이번 소송은) 세 사람이 오랜 기간 소통하고, 고민하다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LG그룹 측은 “상속재산분할 협의서에 서명하고 적법하게 완료된 상속”이라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재계 관계자는 “구광모 회장은 ‘나는 대(代)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파수꾼이다. 양자 입적을 원해서 한 것도 아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며 최근 심정을 전했다.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중앙포토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중앙포토

앞으로 다툼의 쟁점은 ‘상속인 간 합의의 적법성’이 될 전망이다. 유산 상속 때 상속자 간 합의가 있을 경우 이를 유언장이나 법정 상속분보다 우선시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착오·강박·사기 같은 계약 무효, 취소 사유가 있었다면 합의 무효·취소를 주장할 수 있다. 장희진 지음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제척기간(권리의 존속기간, 3년)이 지났음에도 소송을 제기한 게 이례적”이라며 “다만 ‘합의가 적법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는 특수한 경우 제척기간이 지난 뒤에도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인정했던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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