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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홀린 스피커 ‘파라곤’ 오디오 디자인 시대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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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22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를 매칭한 파라곤 제품 카탈로그. [사진 JBL]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를 매칭한 파라곤 제품 카탈로그. [사진 JBL]

애칭 ‘용진이형’으로 더 익숙한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SNS 시대가 오기 전 2007년 개인 홈페이지 ‘정용진닷컴’을 운영했다. 이 곳에서 그는 “경영인이 되지 않았다면 피아니스트가 됐을 것”이라며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 당시 유행하던 애플 아이팟에 4000곡을 담아 집, 사무실, 차 어디서든 음악을 감상하며 해외 출장 시에는 고장을 염려해 두 대를 챙긴다고 밝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디오를 탐닉해 윌슨오디오, 린, 이클립스 등 하이엔드 오디오를 두루 경험했다. 그의 오디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오디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 JBL 파라곤(Paragon)이다. “1957년에 생산된 파라곤의 역사를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다”는 말도 했고, 최근 그가 운영 중인 프라이빗 키친 ‘용지니어스 키친’에도 파라곤의 주니어 모델 메트로곤(Metregon)을 가져다 놓을 정도니, 파라곤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하겠다. 대체 JBL 파라곤이 어떤 스피커이길래 정용진의 마음을 수십년간 사로잡고 있을까.

파라곤의 제조사 JBL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스피커 제조사 중 하나로, JBL의 역사는 미국 오디오 초기 역사와 맞닿아 있다.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발명 이후 오디오 산업의 중심은 미국이 움켜쥐고 있었다.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기업 AT&T는 전화 산업을 독점해 번 돈으로 세계 최고의 과학자를 한데 모은 연구 집단 벨 연구소(Bell labs)를 운영했다. 이들은 100여년간 13명의 노벨상 수상자, 3만 3000여 개의 특허를 쏟아냈다.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CCD, CDMA, 레이저가 모두 이 곳에서 발명됐다.

“경영인 안 됐다면 피아니스트 됐을 것”

파라곤의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 훗날 JBL 사장까지 역임한다. [사진 JBL]

파라곤의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 훗날 JBL 사장까지 역임한다. [사진 JBL]

벨의 경쟁사였던 웨스턴 일렉트릭은 이후 AT&T에 인수돼 벨 연구소가 개발한 제품을 생산, 유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27년 세계 최초의 유성(有聲) 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하자 미국 전역 극장에 갑자기 오디오 시스템이 필요했다. 세계 최초 극장 오디오 시스템 개발은 당연히 벨 연구소의 몫이었고 판매는 웨스턴 일렉트릭이 담당했다. 웨스턴 일렉트릭의 브랜드를 단 극장 오디오 시스템은 전 세계 극장을 독점하며 세계 1위의 기술력을 널리 알렸다.

그런데 AT&T의 영화 산업 독과점이 문제가 됐다. 1937년 웨스턴 일렉트릭은 영화 오디오 사업을 울며 겨자먹기로 분사해야 했고, 사명(社名)을 알텍 서비스 컴퍼니로 변경했다. 같은 시기 영화사 MGM은 웨스턴 일렉트릭 천하에 불만을 품었다. MGM은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스피커를 만들고 싶어하던 중 우연히 출중한 엔지니어를 만나 경천동지할 스피커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엔지니어가 바로 전설의 스피커 설계자 제임스 B. 랜싱(James Bullouh Lansing)이다.

제임스 B. 랜싱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오디오 열정 하나로 1933년 오디오 기업 랜싱 매뉴팩처링 컴퍼니를 설립한다. 그런데 경영을 담당한 동업자 켄 데커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경영난에 빠진 상태였다. 한편 알텍 서비스 컴퍼니는 기존 생산 재고가 바닥나 새로운 스피커 개발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마침 MGM 스피커 개발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엔지니어 제임스 B. 랜싱의 어려움을 전해 듣고 1941년 랜싱 메뉴팩처링 컴퍼니의 인수를 결정한다. 사명은 각 사의 첫 단어를 따 ‘알텍 랜싱(Altec Lansing)’, 또 하나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난 제임스 B. 랜싱은 알텍 랜싱을 위해 새로운 스피커 개발에 몰두한다. 그 결과물이 ‘Voice of Theater’ 시리즈다. 동 시리즈 중 A7, A5는 지금도 오디오 애호가에게 명기(名機)로 꼽힌다. 1946년 알텍 랜싱과 계약이 종료된 제임스 B. 랜싱은 독립을 선언, 자신의 오디오 회사 랜싱 사운드 인코포레이티드를 설립한다. 그러자 알텍 랜싱이 사명에 ‘랜싱’을 쓰지 말라며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다. 결국 제임스 B. 랜싱은 사명을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딴 ‘JBL’로 변경, 지금의 JBL에 이른다.

JBL 창업 후 다수의 명기를 연이어 발표하지만 경영에 서툴렀던 그는 또 다시 경영난에 빠졌다. 지분 일부를 매각하고 신제품 개발에 심기일전해 봐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49년 9월 29일 제임스 B. 랜싱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JBL의 경영은 투자자가 선임한 윌리엄 H. 토마스가 맡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랜싱의 사망 보험금 1만 달러가 회생의 불씨가 되어 JBL의 찬란한 전성기가 시작된다.

1950년대 전 세계는 전쟁 종식과 함께 경제 호황이 찾아오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배태했다. LP, 스테레오, FM 라디오, 컬러 TV 기술이 탄생하고 홈 오디오가 널리 보급되며 카라얀, 엘비스 프레슬리 등 레코드 스타들이 등장한다. JBL도 홈 스피커 시장에 진출을 선언했고, 초기작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흥행에 자신감을 얻은 JBL은 탁월한 기술력을 세상에 천명할 초대형 스피커 제작을 시도한다. 첫 제품이 1954년 출시한 하츠필드(Hartsfield)다. 발매 당시 라이프 지(誌)는 하츠필드를 ‘궁극의 꿈의 스피커’라 절찬했다. JBL은 하츠필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바로 후속작에 착수한다.

1950년대 중반 오디오 업계는 70년의 모노 시대를 마무리하고 스테레오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테레오의 존재 이유는 모노에 없는 사운드 스테이지, 눈을 감으면 선연하게 그려지는 무대 표현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스피커 기술은 이를 구현할 수 없었다. 이에 대비해 JBL은 엔지니어 리처드 레인저의 스테레오 스피커 설계안을 일찌감치 구매해 두었다. 1대의 스피커로 스테레오를 구현할 수 있는 센세이셔널한 설계였다. 하지만 이를 상품화하는 작업이 어려워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JBL은 디자이너를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최종 낙점한 인물이 산업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Arnold Wolf)다. 그는 의뢰받은 스피커를 기술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예술품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싶었다. 당시 미국에는 북유럽 하이엔드 가구들이 대거 유입됐고, 한스 베그너, 아르네 야콥슨, 임스 부부 등 전설의 디자이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압도적인 피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놀드 울프는 스피커를 이들 제품과 어울릴 수 있는 수준으로 제작하고 싶었다.

파라곤 값 현재가치로 4000만원 호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전시장을 찾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연합뉴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전시장을 찾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연합뉴스]

아놀드 울프의 설계대로라면 이 스피커는 장인이 112시간 동안 수작업하고 오일 작업에만 꼬박 3일을 소모해야 했다. JBL의 수장 윌리엄 H. 토마스는 그의 모든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57년 JBL의 기함 ‘파라곤’이 탄생한다. 파라곤은 폭 2.7m, 무게 340㎏에 달하는 대형기였다. 파라곤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게 된 것은 오로지 스테레오 때문이다. 파라곤의 좌우 양끝에 위치한 스피커 유닛은 독특하게도 방향이 감상자가 아닌 제품 전면에 위치한 완만한 곡선의 배플로 향한다. 그렇게 배플에서 반사된 음이 감상자를 향하는 ‘굴절’ 방식으로 스테레오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파라곤은 스테레오를 위해 거대해졌지만, 아놀드 울프는 이를 궁극의 예술성으로 승화시켰다. 스피커하면 거대한 나무 궤짝을 연상했던 시대에 파라곤의 미감은 동시대 미국인이 선망했던 루돌프 그라첼(Rudolf Glatzel)의 사이드 보드에 비견됐다. JBL도 이전 제품과 달리 파라곤은 하이엔드 가구처럼 마케팅했다. 1957년 출시 당시 파라곤의 가격은 1830달러.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4천만원을 호가하는 초고가였다.

파라곤은 비싼 가격에도 히트했다. 오디오 애호가라면 모두가 파라곤을 원했다. 파라곤의 예술성은 오디오에 관심없던 여성 소비자까지 매혹시켰다. 파라곤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JBL은 1960, 70년대 스피커 시장의 정상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시간이 지나도 파라곤의 인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파라곤은 1957년부터 1983년까지, 무려 26년간 생산됐다. 수명이 길어야 10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오디오 세계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도 파라곤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빈티지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JBL 파라곤은 오디오와 디자인이 조우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례다. 파라곤의 히트로 오디오 산업은 디자인을 적극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TV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침체에 빠졌던 뱅앤올룹슨은 1964년 디자이너 야콥 옌센을 맞이하며 오디오 세계에 B&O라는 독창적 디자인 언어를 제시했다. 영국 스피커 제조사 B&W도 영국 최고의 산업 디자이너 케네스 그렌지와 함께 전설의 800 시리즈를 함께 제작하고 시장 1위에 올랐다. 아놀드 울프 그리고 파라곤이 있어 척박한 오디오 세계에 디자인이 움튼 것이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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