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이 꿈꾼 클래식 민주화 ‘디지털 베를린 필’서 실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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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호 22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카라얀의 뉴욕 아파트 사진. 왼쪽에 그가 애용한 AR-3 스피커가 눈에 띈다. [사진 AR]

카라얀의 뉴욕 아파트 사진. 왼쪽에 그가 애용한 AR-3 스피커가 눈에 띈다. [사진 AR]

에디슨의 포노그라프 발명 이전, 음악은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 덧없는 연주였다. 레코드와 오디오의 등장으로 우리는 수십 년 전 연주된 음악도 원하면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 기록에 머물렀던 레코드는 이후 원음(原音)에 윤기와 아름다움을 더하는 ‘레코드 예술’로 승화했다. 146년의 레코드 역사 중 가장 위대한 레코드 예술가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꼽는다.

어린 시절 직접 오디오를 조립할 정도로 기기에 능했던 카라얀은 자연스레 빈 공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추동한 음악을 떨쳐낼 수 없었던 그는 빈 음대로 전과한다. 졸업 이후 지휘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지만 종전 이후 나치 입당 이력으로 2년간 활동이 금지되며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때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그를 찾아왔다.

월터 레그는 최초의 레코드 프로듀서로 불리는 인물로, 레코드의 완성도를 궁극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자 했던 또 한 명의 레코드 예술가다.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를 발탁한 선구안까지 갖춘 그였다. 그는 카라얀을 보자마자 자신이 꿈꿔온 레코드의 이상을 구현할 적임자라 판단했다. 1946년 카라얀은 EMI와 독점 계약한다. 지휘 활동을 금지 당한 카라얀의 유일한 돌파구는 레코드였다. 두 사람은 지상 최고의 레코드를 제작하는 데 의기투합했다.

“오디오로 언제 어디서나 최고 음 즐겨”

당시 클래식 레코드의 음은 형편없었고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이 시기 레코드 경험이 많지 않았던 카라얀은 오디오를 마련해 다른 클래식 앨범을 감상하고 치열하게 분석했다. 레코딩 시에는 레퍼런스가 될 타 아티스트의 앨범을 듣고 지휘대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또한 카라얀은 레코드가 오케스트라를 비추는 거울이라 생각해, 자신의 연주를 듣고 또 들으며 스스로의 실력을 끊임없이 검증했다. 고집 센 그도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조언에는 귀 기울였다. 완벽한 음정과 정확한 리듬으로 대표되는 카라얀의 음은 이 시기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르주 첼리비다케와 같은 일부 지휘자는 레코드를 기피하거나 폄하했다. 반면 카라얀은 “아무리 훌륭한 콘서트홀이라 할지라도 최고의 음을 만끽할 수 있는 좌석은 전체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디오와 레코드는 감상자가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음을 즐길 수 있게 해주죠”라고 강조했다. 그는 레코드를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누릴 수 있는 ‘음악의 민주화’를 꿈꿨다.

카라얀의 선택은 옳았다.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전 세계에 경제 호황이 찾아왔다. LP, 스테레오, FM 라디오, 컬러 TV라는 혁신적인 기술이 배태되며 본격적인 가정용 오디오 시장이 열렸다. 1930년대 라디오의 보급으로 쇠퇴했던 레코드가 화려하게 부활하며 연일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카라얀이 애용한 AR-3a 스피커. [사진 AR]

카라얀이 애용한 AR-3a 스피커. [사진 AR]

레코드 부활의 기수는 카라얀이었다. EMI에서 15년간 100장이 넘는 LP를 쏟아냈는데, 클래식 음반 판매량 1위는 단연 그였다. 라이벌 지휘자의 명성이 유럽 내 머무를 때 그는 레코드와 함께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레코드로 쌓아 올린 팬덤은 결국 1956년 그가 오래 염원한 베를린 필하모니 종신 지휘자 타이틀까지 안겨준다. 같은 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 감독, 1957년 빈 국립 가극장 예술 감독까지 모두 그의 차지였다. 레코드로 이룩한 신화, 카라얀 제국의 시작이었다.

그는 여전히 레코드 퀄리티에 집중했다. 얼리어답터인 그는 LP(Long Play), 스테레오 기술 도입을 주저한 EMI에 불만을 가졌다. 1959년 경쟁자 데카(Decca)와 덜컥 계약한다. 데카는 일찌감치 ffrr(Full Frequency Range Recording)같은 선진적 기술을 제창했고 스테레오 시대에 3대의 노이만 마이크, 이른바 ‘데카 트리’로 만들어낸 압도적인 고음질로 극찬 받았다. 이를 주도한 프로듀서가 레코드 예술가 존 컬쇼(John Culshaw)다. 카라얀은 존 컬쇼와 함께 눈부신 명반을 쏟아냈다.

카라얀은 1950년대부터 선도적 오디오 기업 소니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고 70년대에는 소니의 CD 개발에 깊숙이 관여했다. 74분의 CD 수록 시간이 카라얀의 의견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카라얀은 아날로그와 비교해 놀랍도록 정숙한 CD의 음에 찬탄했다. 세계 최초 디지털 레코딩, 세계 최초 CD의 타이틀은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주관하는 1982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통해 CD 탄생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카라얀이 CD 홍보 대사를 자처한 덕분에 CD 판매량은 가파르게 성장했고 발매 4년만에 LP의 그것을 앞질렀다.

카라얀은 영상 시장의 가능성도 일찌감치 예견했다. 이에 1965년 클래식 영상 제작사 코스모텔(Cosmotel)을 설립했다. 카라얀의 영상은 탁월했지만 당시엔 소비자에게 판매할 영상 미디어 생태계가 전무했다. 결국 1971년 코스모텔을 레오 키르히 소유의 유니텔에 매각한다. 10년 후 MTV 개국과 함께 뮤직비디오 시대가 열렸고 때마침 고화질 미디어 LD(레이저 디스크)도 등장했다. 영상 사업의 적기라 판단한 카라얀은 1982년 영상 제작사 텔레몬디알(Telemondial)을 설립, 자신의 음악을 빠짐없이 영상으로 기록했다. “내 모든 레퍼토리를 LD로 다시 녹음할 수 있다면 내 몸을 냉동해도 좋다”라고 할 만큼 열정을 불태웠다.

AR 스피커 애용, 홍보 대사 자처

카라얀의 DNA를 잇고 있는 OTT 디지털 콘서트홀. [사진 Digital Concert Hall]

카라얀의 DNA를 잇고 있는 OTT 디지털 콘서트홀. [사진 Digital Concert Hall]

모두가 카라얀의 고화질, 고음질 영상을 탐냈다. 특히 폴리그램과 소니가 적극적이었지만 카라얀이 원하는 조건에 이르지 못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1989년, 카라얀은 이런저런 이유로 베를린 필하모니 종신 지휘자를 사임했다. 이때 CBS,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하며 세를 불린 소니가 인수에 좀 더 적극적으로 임했고 카라얀도 마음을 바꿔 협상에 응했다. 1989년 7월 17일 카라얀은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협상 마무리를 위해 달려온 소니의 오가 노리오 사장을 맞으러 침대에서 일어서던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영상을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린, 카라얀다운 마지막이었다.

카라얀은 자신의 연주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조력자, 오디오를 사랑했다. 정확한 음을 들려주는 오디오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집, 별장, 투어 중 머무는 호텔의 오디오까지 직접 챙겼다. 카라얀의 후기 프로듀서 미셸 글로츠는 그의 오디오 설치를 도와주면서 가까워졌을 정도다. 카라얀의 오디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제품은 AR(Acoustic Research, 어쿠스틱 리서치) 스피커다. AR은 1954년 에드가 빌처가 미국 뉴욕에 창업한 스피커 제조사로, 콤팩트한 사이즈로 전 대역(全帯域) 음을 들려주는 ‘어쿠스틱 서스펜션’ 기술을 선보였다.

AR 스피커는 압도적인 음을 들려주며 가정뿐만 아니라 레코딩 스튜디오, 공연장까지 널리 쓰였다. 녹음 시 스튜디오에 오랜 시간 머물던 카라얀은 당시 스튜디오에서 인기였던 AR 스피커에 호감을 갖게 돼 뉴욕 아파트에서 AR-3a를 애용했다. 1970년대에는 재즈 아티스트 마일즈 데이비스와 함께 AR 홍보 대사로 활동했다.

카라얀은 “좋은 시기에 태어나 새로 등장한 레코드 매체를 모두 경험할 수 있어 행복했다”라고 술회했다. 그는 축음기, SP, LP, 스테레오, CD, LD를 두루 경험했고 이를 누구보다 빨리 자신의 레코드에 도입했다. 그는 새로운 미디어의 홍보 대사를 자처했으며 그의 명성 덕에 신기술이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다. 그는 오디오 시장의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레코드에 천착한 것은 클래식 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유산은 베를린 필하모니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클래식 OTT ‘디지털 콘서트홀(Digital Concert Hall)’로 이어지고 있다. 카라얀이 떠난 후에도 베를린 필하모니는 꾸준히 영상 아카이브를 축적했다. 이제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공연 실황을 콘서트 홀을 찾지 않고도 태블릿, 스마트폰, 스마트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4K HDR 고화질, 96kHz/24bit 고음질 서비스까지 더했다. 베를린 필의 공연 티켓은 여전히 10만 원 이상을 호가하지만 이 모든 콘텐트를 고품질로 즐길 수 있는 ‘디지털 콘서트홀’의 요금은 월 1만9900원이다. 레코드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혁신가 카라얀, 그가 열렬히 소망했던 클래식의 민주화가 ‘디지털 콘서트홀’로 실현됐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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