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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오디오 산업, 히틀러 정치 선동 연설 때문에 번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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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22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디올 쇼에 등장한 클랑필름 스피커 유로노어. [사진 디올]

디올 쇼에 등장한 클랑필름 스피커 유로노어. [사진 디올]

2021/22 디올(Dior) 패션쇼는 팬데믹을 이유로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온라인 생중계로 쇼를 지켜보던 전 세계 패션 리더들은 무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스피커에 눈길을 빼앗겼다. 디올 쇼에서 선보인 스피커는 독일 클랑필름(Klangfilm)사의 유로노어(Euronor)다. 유로노어는 1930년대 유럽의 대형 극장에서 설치되었던 스피커로, 독보적인 음향으로 90년이 지난 지금도 컬렉터를 통해 초고가에 거래된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선망해 마지 않는 클랑필름의 신화는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애용했다는 전설에서 출발한다.

세계 최초의 오디오로 1877년 미국 에디슨이 발명한 포노그래프를 꼽는다. 반면 세계 최초의 스피커는 1874년 독일 어니스트 W. 지멘스(Ernst W. Siemens)가 발명했다. 다만, 지멘스는 특허 출현 단계에 그쳤고 이를 최초로 제품화한 이는 미국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다. 벨은 지멘스의 특허를 이용해 전화기의 송신부 스피커를 개발했다. 하지만 벨의 스피커는 소리가 탁해 음질이 형편없었다. 이에 벨은 스피커에 탄소 소재를 추가해 음질을 개선한 독일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의 특허를 구매한다. 에밀 베를리너는 특허 판매 대금으로 에디슨이 발명 후 방치해 두었던 축음기를 혁신한 그라모폰(Gramophone)을 발명했다.

히틀러, 매일 영화 한 편 봐야 직성 풀려

초기 오디오 시대는 이렇게 미국과 독일이 팽팽하게 겨루며 성장했다. 이 시기 독일 오디오 시장을 이끈 기업은 지멘스와 AEG다. 지멘스는 전술한 발명가 어니스트 W. 지멘스가 1874년 창업한 기업이며, AEG는 엔지니어 에밀 라테나우가 1883년 에디슨의 전구 특허권을 취득하며 세운 독일 에디슨 회사(DEG)가 모태다. 두 기업은 통신, 오디오 사업을 위한 합작 회사 텔레풍켄(Telefunken)을 1903년 설립했고, 이후 영화 산업을 위한 두 번째 합작 기업 클랑필름(Klangflim)을 1928년 설립했다.

최근 개봉한 데이먼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은 유성 영화 등장 시기의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등장한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는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을 맡고, 필름에 소리를 입히는 사운드 온 필름(Sound on film) 기술 개발 및 극장 음향 기기 생산은 각각 벨 연구소와 ERPI(웨스턴 일렉트릭)가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술 개발은 독일이 더 빨랐다. 독일 트라이에곤(Tri-Ergon)사가 재즈 싱어가 개봉한 1927년보다 8년 먼저 1919년 사운드 온 필름 특허를 취득했고 1922년 최초의 유성 영화 제작까지 마쳤다. 하지만 트라이에곤은 일반 극장에 자신의 기술을 보급하는데 실패했다.

유로노어 주니어. 상위 모델 유로노어보다 작아 상대적으로 운용하기 편하다. [사진 디올]

유로노어 주니어. 상위 모델 유로노어보다 작아 상대적으로 운용하기 편하다. [사진 디올]

이에 독일 영화 산업이 연대했다. 독일 주요 영화사들이 연합해 유성 영화 제작 및 기술 보급을 위한 합작 기업 토비스(Tobis)를 설립하고 트라이에곤의 특허를 인수한다.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에 맞서는 영화 음향 기기 파트너로 클랑필름을 맞이한다. 토비스-클랑필름은 독일, 영국,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자신들의 기술을 보급하며 미국 진영과 본격적인 영화 전쟁에 돌입한다.

결국 두 진영의 경쟁은 격렬한 특허 소송전으로 이어졌다. 특허 출현은 독일이 빨랐지만 미국 법원은 이를 좀처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지리한 소송전이 길어질 즈음 1930년 6월 6일, 미국의 ERPI, RCA와 독일의 지멘스, AEG 대표가 파리에서 만나 분쟁 종식을 협의한다. 이 파리 평화 협정의 결과로 클랑필름이 유럽 전역의 극장권 독점권을, 웨스턴 일렉트릭이 미국 및 유럽 이외 지역의 극장 독점권을 획득했다. 이후 클랑필름과 웨스턴 일렉트릭은 치열하게 경쟁하며 양사의 전성 시대가 시작된다.

파죽지세로 성장하며 명기를 쏟아내던 클랑필름은 1933년 1월 독일 제국 총수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를 마주한다. 히틀러는 음악과 영화를 사랑했다. 형편이 어려웠던 고학생 시절에도 중요한 공연은 빠짐없이 감상했다. 특히 그의 맘을 사로잡은 이는 바그너로, 학생 시절 그의 오페라를 40회 이상 감상할 정도였다. 집권 이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 바그너와도 가까이 지냈다. 히틀러는 영화도 매일 한 편을 감상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토록 영화와 음악을 탐닉한 그가 오디오를 가까이 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자신의 오디오로 클랑필름을 낙점했다.

히틀러 치하 나치 정권은 오디오 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나치 정권이 오디오를 프로파간다(정치 선동)에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그의 장기인 연설로 권력을 움켜 쥐었고, 2인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그의 연설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때마침 라디오가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괴벨스는 라디오를 주요 정치 도구로 낙점, 방송사를 장악하고 제조사 텔레풍켄을 압박해 라디오를 저가에 대량 생산하도록 요구했다. 이렇게 국민 라디오 VE301이 탄생했다. VE301은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 파격가에 판매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민 라디오의 히트로 1933년 100만대에 머물렀던 독일 라디오 판매량은 5년 후 1000만대로 폭증한다. 당시 독일의 라디오 보급율은 12%에 달했고, 이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괴벨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히틀러 연설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학교, 공장, 공원 등 공공 장소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했다. 또한 연설이 또렷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마이크, 스피커 기술까지도 직접 관여했다. 이런 정부 주도 오디오 육성 덕택에 1930년대 독일 오디오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독일 마이크 기술로 젠하이저·AKG 탄생

아돌프 히틀러. [사진 이현준]

아돌프 히틀러. [사진 이현준]

이 시기 탄생한 또 하나의 위대한 오디오 기술은 오픈 릴 테이프다. 히틀러는 라디오 생중계 연설에 점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그 여파가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녹음, 편집해 송출하는 방법을 모색했고 이에 부응한 신기술이 AEG의 오픈 릴 테이프다. 릴 테이프는 탁월한 음질로 히틀러의 음성을 생생하게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 히틀러의 위치를 감추는 데도 요긴하게 사용됐다. 당시 연합군은 놀랍도록 또렷한 히틀러 음성의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했다.

나치 정권이 오디오 다음으로 낙점한 것은 영화였다. 정치 선전 활동은 영상일 때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모든 영화사를 장악해 자신이 직접 지휘, 검열했으며 영화 기술 표준까지 관여했다. 그는 자신이 애용한 클랑필름이 경쟁자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에 뒤지지 않도록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틀러의 든든한 지원 아래 클랑필름은 전성기를 구가하며 명기를 쏟아냈다. 당시 클랑필름의 유로딘, 비오노르, 유로노어는 당대 최고의 스피커로 꼽혔다. 특히 대형기 유로노어는 1500석 규모의 초대형 극장를 위한 스피커로, 높이만 4m에 달하고 무게 또한 수백 ㎏에 달했다.

승승장구하던 독일 오디오 산업은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에 클랑필름은 AEG의 지분을 정리, 지멘스의 소유가 되었고 반대로 텔레풍켄은 지멘스의 지분을 정리해 AEG의 소유가 된다. 클랑필름은 종전 이후에도 지멘스 소유로 남아 꾸준히 신제품을 소개했지만 1930년대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지멘스는 도이치 그라모폰를 인수하고 카라얀까지 스카웃하며 음악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후 열정이 식으며 도이치 그라모폰을 필립스에 매각했고, 결국 클랑필름도 사멸했다.

독재자 히틀러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지만 집권 시기 동안 집중적으로 육성한 독일 오디오 산업은 종전 후 수많은 기술을 배태했다. 히틀러가 사랑한 오픈 릴 테이프는 종전 후 연합군이 입수해 미국으로 가져갔고, 오디오 제조사 암펙스(Ampex)가 이를 개조한 레코더를 1946년 발매했다. 당시 방송 때마다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부담을 느낀 가수 빙 크로스비가 이를 발견해 자신의 방송에 적극 사용했다. 오픈 릴 테이프의 놀라운 음질은 점점 소문나면서 전 세계 레코딩 스튜디오의 표준이 되었고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히틀러의 연설을 돋보이게 했던 독일 마이크 기술은 종전 후 세계 최대 마이크 제조사 젠하이저, AKG 탄생의 기반이 된다. 널리 보급되었던 국민 라디오는 독일 가정에 그대로 남아 히틀러의 연설 대신 그가 혐오했던 미국의 재즈 음악이 가득 채웠다. 이 시기 재즈를 즐겨 들었던 디터 람스, 하르트무트 애슬링거는 훗날 걸출한 오디오 디자이너로 탄생한다. 이 듀오가 선보인 브라운, 베가의 오디오를 전세계 애호가들은 지극히 사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오디오 사랑이 전후(戰後) 오디오 산업 혁신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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