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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2살 소위 사망 50년뒤…거꾸로 쓴 일기장 드러난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971년 11월 임관한 성기석 소위는 경기도 고양의 한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1972년 3월 14일 소속부대를 무단이탈해 극단선택을 했다. 성 소위 사후 유서와 일기장 등이 소실됐고 유족도 성 소위의 사진 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생전 성 소위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 사진 성 소위 유족

1971년 11월 임관한 성기석 소위는 경기도 고양의 한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1972년 3월 14일 소속부대를 무단이탈해 극단선택을 했다. 성 소위 사후 유서와 일기장 등이 소실됐고 유족도 성 소위의 사진 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생전 성 소위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 사진 성 소위 유족

1972년 3월 15일 오전 3시30분쯤 경기 고양의 한 여관. 주인 A씨는 느닷없는 총성에 잠에서 깼다. 처음엔 인근 부대에서 훈련을 한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A씨는 동이 튼 뒤 객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날 밤 입실했던 인근 부대 소속 성기석(당시 22세) 소위가 피투성이가 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숨을 거둔 그의 오른손엔 권총이 들려있었다.

3달 전 부대에 온 신임 소위의 사망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성 소위는 전날 일직사관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병사와 부사관은 “성 소위가 껌을 한 통씩 나눠주면서 구두를 깨끗이 닦으라 했고 점호가 끝난 뒤 사무실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부대원을 면담한 헌병대 조사관은 “성 소위가 일직 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부대를 이탈해 여관에 투숙한 뒤 총으로 극단 선택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단 선택 이유는 사망경위서에 적히지 않았다.

부대를 찾은 성 소위의 아버지는 “장남이 편지로 군 생활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절규했다. 가혹 행위가 의심됐지만, 증거가 없었다. 당시 부대엔 문제를 키우지 말자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성 소위의 시신은 화장됐고 유골은 인천 앞바다에 뿌려졌다. 아들이 사망하고 2년 뒤 아버지는 결핵이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진정제기…진상규명위 조사

잊혀가던 신임 소위의 죽음은 2020년 6월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의 존재를 알게 된 성 소위의 동생이 진정을 내면서다. 심장질환으로 병상에 있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형의 억울함을 꼭 풀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진상규명위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사망경위서, 매화장보고서의 정보는 제한적이었고 고인의 유서와 일기장은 폐기된 상태였다.

이기원(78)씨는 1972년 성 소위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내무반장이었던 그는 자신이 들은 성 소위에 대한 이야기를 진상규명위에 소상히 전했다고 했다. 심석용 기자

이기원(78)씨는 1972년 성 소위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내무반장이었던 그는 자신이 들은 성 소위에 대한 이야기를 진상규명위에 소상히 전했다고 했다. 심석용 기자

다행히 성 소위와 함께 근무한 전직 하사 이기원(78)씨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부대 내무반장을 맡았던 그는 “성 소위가 사망하기 전 부대대장에게 구타와 모욕 등 가혹 행위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사망 3일 전 축구 시합에서도 가혹한 욕을 듣고 두들겨 맞았다고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고인의 일기장 이야기도 꺼냈다. 이씨는 “성 소위가 살던 장교 숙소에 헌병조사관과 함께 갔을 때 망인의 일기장을 본 적 있다”며 “조사관이 잠깐 읽어주기를 일기장엔 ‘군 생활이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했다. 성 소위의 일기장은 거꾸로 쓰여 거울로 비춰야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50년 만에 인정된 부대 내 가혹 행위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성기석 소위의 순직을 인정했다. 사진 국방부 결정서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성기석 소위의 순직을 인정했다. 사진 국방부 결정서

이후 “성 소위가 상급자의 가혹 행위와 부사관들과의 갈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전직 부대원의 진술이 이어졌다. 진상규명위는 중대장의 폭언과 폭행이 이뤄졌다는 증거도 발견했다. 중대장 B씨가 성 소위를 5~6회 폭행하는 등의 이유로 견책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징계처분서였다. 2년여간에 조사 끝에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9월 성 소위를 순직으로 재심사하라고 국방부에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13일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망인은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과 관련한 구타·폭언·가혹 행위 또는 업무 과중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 자해행위를 해 사망한 사람에 해당한다”며 성 소위의 순직을 인정했다. 성 소위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지 18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성 소위의 동생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결국 형님의 순직을 알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군이 형님의 고충에 귀 기울이고 사후에 조사를 제대로 했다면 이런 원통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군에서 간부 158명이 극단선택을 했다. 이들 중 96명(60%)이 하사, 소위 등 근속연수가 10년 이하인 초급 간부였다. 채재광 진상규명위 조사관은 “군 간부는 병사보다 고충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고 주목도 덜 받는다”며 “군 간부의 정신 건강 악화 문제에 대한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 순직 사망상태인 군인은 3만여명이지만 규명위에 진정된 사건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성 소위 사례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군 사망사건에 대한 조사 기간과 범위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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