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3월 15일 오전 3시30분쯤 경기 고양의 한 여관. 주인 A씨는 느닷없는 총성에 잠에서 깼다. 처음엔 인근 부대에서 훈련을 한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A씨는 동이 튼 뒤 객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날 밤 입실했던 인근 부대 소속 성기석(당시 22세) 소위가 피투성이가 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숨을 거둔 그의 오른손엔 권총이 들려있었다.
3달 전 부대에 온 신임 소위의 사망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성 소위는 전날 일직사관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병사와 부사관은 “성 소위가 껌을 한 통씩 나눠주면서 구두를 깨끗이 닦으라 했고 점호가 끝난 뒤 사무실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부대원을 면담한 헌병대 조사관은 “성 소위가 일직 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부대를 이탈해 여관에 투숙한 뒤 총으로 극단 선택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단 선택 이유는 사망경위서에 적히지 않았다.
부대를 찾은 성 소위의 아버지는 “장남이 편지로 군 생활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절규했다. 가혹 행위가 의심됐지만, 증거가 없었다. 당시 부대엔 문제를 키우지 말자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성 소위의 시신은 화장됐고 유골은 인천 앞바다에 뿌려졌다. 아들이 사망하고 2년 뒤 아버지는 결핵이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진정제기…진상규명위 조사
잊혀가던 신임 소위의 죽음은 2020년 6월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의 존재를 알게 된 성 소위의 동생이 진정을 내면서다. 심장질환으로 병상에 있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형의 억울함을 꼭 풀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진상규명위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사망경위서, 매화장보고서의 정보는 제한적이었고 고인의 유서와 일기장은 폐기된 상태였다.
다행히 성 소위와 함께 근무한 전직 하사 이기원(78)씨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부대 내무반장을 맡았던 그는 “성 소위가 사망하기 전 부대대장에게 구타와 모욕 등 가혹 행위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사망 3일 전 축구 시합에서도 가혹한 욕을 듣고 두들겨 맞았다고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고인의 일기장 이야기도 꺼냈다. 이씨는 “성 소위가 살던 장교 숙소에 헌병조사관과 함께 갔을 때 망인의 일기장을 본 적 있다”며 “조사관이 잠깐 읽어주기를 일기장엔 ‘군 생활이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했다. 성 소위의 일기장은 거꾸로 쓰여 거울로 비춰야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50년 만에 인정된 부대 내 가혹 행위
이후 “성 소위가 상급자의 가혹 행위와 부사관들과의 갈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전직 부대원의 진술이 이어졌다. 진상규명위는 중대장의 폭언과 폭행이 이뤄졌다는 증거도 발견했다. 중대장 B씨가 성 소위를 5~6회 폭행하는 등의 이유로 견책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징계처분서였다. 2년여간에 조사 끝에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9월 성 소위를 순직으로 재심사하라고 국방부에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13일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망인은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과 관련한 구타·폭언·가혹 행위 또는 업무 과중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 자해행위를 해 사망한 사람에 해당한다”며 성 소위의 순직을 인정했다. 성 소위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지 18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성 소위의 동생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결국 형님의 순직을 알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군이 형님의 고충에 귀 기울이고 사후에 조사를 제대로 했다면 이런 원통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군에서 간부 158명이 극단선택을 했다. 이들 중 96명(60%)이 하사, 소위 등 근속연수가 10년 이하인 초급 간부였다. 채재광 진상규명위 조사관은 “군 간부는 병사보다 고충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고 주목도 덜 받는다”며 “군 간부의 정신 건강 악화 문제에 대한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 순직 사망상태인 군인은 3만여명이지만 규명위에 진정된 사건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성 소위 사례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군 사망사건에 대한 조사 기간과 범위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