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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사랑스런 추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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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30면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정음사 1948)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만 역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배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짐을 들어주고 여행 가방을 끌어주고 조곤조곤 끊임없이 당부의 말을 건네는 이들. 저는 배웅을 마친 그들이 혼자 남아 한동안 승강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또 역에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과 선로 끝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끔뻑이는 사람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초조하게 서성이는 사람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장 환하게 웃어 보이는 사람들. 봄이든 사람이든 조금 더 기다려도 좋을 오늘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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