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진화한 시각특수효과(VFX)를 담은 한국 SF영화들이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 잇따라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말 넷플릭스에 공개된 SF 판타지 영화 ‘외계+인’ 1부(감독 최동훈)는 “모든 장르가 혼합된 폭발적인 영화”(뉴욕타임스) 등 외신의 호평 속에 재평가받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해 여름 개봉해 흥행 참패를 했지만, 1일 현재 해외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선 관객지수 89%(100% 만점)를 기록했다. 지난달 개봉한 마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 마니아’(83%)보다 높은 수치다.
해외서 주목받는 한국 SF 영화 기술력 #로봇 영화 '정이' VFX 제작 비하인드 #'외계+인' '승리호' 넷플릭스서 화제 #"VFX 성장, 로버트 태권브이가 계기"
로봇 CG 캐릭터 타이틀롤 된 첫 K-SF
특히 지난 1월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출시돼 넷플릭스 비영어 영화 흥행 1위에 오른 SF 영화 ‘정이’(연상호 감독)는 첨단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 인공지능(AI) 로봇을 타이틀롤로 내세운 첫 한국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CG로 만든 캐릭터가 극 전체를 이끄는 도전이란 점에서다.
불법(佛法)을 깨우친 사찰 가이드 AI에 관한 단편 ‘천상의 피조물’(2012년 개봉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수록), 목소리를 통해 위치추적이 가능한 로봇과 함께 잃어버린 딸을 찾는 아버지의 로드무비 ‘로봇, 소리’(2016), 삶과 죽음에 관한 고민에 빠진 간병 로봇을 다룬 ‘간호중’(2021) 등 기존 한국 SF 영화들은 정교한 로봇 더미(모형 인형)를 활용하거나, 배우가 특수 분장을 해 로봇 캐릭터를 표현해왔다. 그에 비해 ‘정이’는 VFX 기술의 진일보를 보여준 작품이란 평가다.
신파 코드, 이야기 만듦새가 아쉽다는 지적도 있지만, 시각효과에선 할리우드 못지않다는 반응이 많다. 미국 매체 CNN은 “‘아이, 로봇’의 안드로이드 디자인,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 흔적도 보인다”며 '정이'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견줬다.
"'트랜스포머: 로보트 태권브이 VS 메가트론' 제작 꿈꾸죠"
‘정이’는 콘텐트 투자‧배급사 NEW의 VFX 계열사 엔진비주얼웨이브(이하 엔진)가 참여한 작품이다. ‘정이’를 담당한 엔진의 정황수 VFX 슈퍼바이저는 “해외에선 제작비 수백억 원의 한국 VFX가 1000억~2000억원을 들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견줄만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의 기술력이면 할리우드의 검증된 로봇 시리즈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가령 ‘트랜스포머’ 10편을 ‘로보트 태권브이’ 대 ‘메가트론’(트랜스포머 로봇 캐릭터) 대결 구도로 한국에서 제작하는 것도 꿈꿔볼 만하다”면서다.
프리프로덕션 아트 디렉터 나일환 이사는 실존 인물의 모습을 본뜬 로봇 CG 캐릭터의 탄생 자체가 기존 기술력을 끌어올린 도전이었다고 강조했다.
‘정이’는 2194년, 기후 위기로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우주에 정착한 인류의 내전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전투 중 식물인간이 된 전설적 용병 정이(김현주)의 딸 서현(강수연)은 군수회사 크로노이드의 연구팀장이 되어 엄마를 전투 AI 로봇으로 되살리려 한다.
나 이사는 “전작(‘반도’ ‘지옥’)부터 함께한 연상호 감독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VFX쪽에서 이를 현실적으로 보여줄 장치들을 보강하고 확장해나갔다”면서 “물에 잠긴 세상에선 선박 해체 자재, 플라스틱 쓰레기의 재활용이 많을 거라 보고 로봇 재료도 기존 SF의 금속 대신 플라스틱을 중심으로 녹슬지 않는 알루미늄, 신소재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현실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외면당할 거라 보고, 우주정거장은 1960~70년대 세계 과학계에 전통적으로 쓰인 형태를, 로봇은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한 리얼한 휴머노이드 형태를 취했다”고 했다.
로봇 연기 한장면 위해 부위별 수차례 연기
차별화도 고심했다. 정이는 딸을 둔 중년의 용병이란 설정을 토대로 감정선 표현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 SF 속 여성형 로봇이 젊은 여성의 신체를 부각한 것과 다른 지점이다.
김현주가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로봇 캐릭터의 얼굴로 연기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특징적인 입 모양, 얼굴 윤곽선 등을 최대한 남겨두고 눈의 움직임 같은 로봇 특유의 매커니즘을 살렸다. 대사를 할 때 입 모양이 맞지 않아 어색해질 만한 부분은 전투 로봇답게 입 움직임을 최소화해 보완했다. 또 눈빛 연기가 가능하도록 눈 부분 부품을 여러 개로 분리해 디자인했다.
정 슈퍼바이저는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처럼 배우의 연기를 모션 캡처해 활용하는 방식과 더불어 김현주의 감정을 애니메이터들이 눈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CG 캐릭터의 눈동자에 미세하게 새겨넣는 작업을 했다”면서 “김현주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연기한 걸 컴퓨터로 캡처해 로봇 연기를 구현했다”고 했다.
한국에선 최신 기술이지만, 할리우드에선 이미 배우의 여러 부위 움직임을 동시 다발적으로 캡처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이 있다고 귀띔한 그는 추후 이런 기술이 한국에서도 활용될 것이라 내다봤다.
한국 로봇 VFX 분수령 된 작품은
한국 VFX 수준을 현단계로 끌어올린 계기론 실사판 ‘로보트 태권브이’ 제작 시도가 꼽힌다. 김청기 감독의 동명 애니메이션(1976)을 제작사 신씨네, 원신연 감독이 2010년 개봉을 목표로 실사화 도전한 프로젝트다. 당시 국내 대표 VFX 업체 7개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했다. 순제작비 약 150억원 중 VFX 비용에 60~70억원을 투자하기로 하며 기대받았지만, 제작에 난항을 겪다 중단됐다.
정 슈퍼바이저는 “‘로보트 태권브이’의 깡통로봇은 제가 어릴적 어린이들의 방탄소년단 같은 존재였다. 실사영화 제작은 불발됐지만, 20~30명 인원 군소업체가 흩어져있던 VFX 업계가 서로 기술력을 파악하고 합병을 통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짚었다. 코로나 시기 선보인 SF 대작영화들은 그간의 VFX 발전을 보여주는 성과로 꼽힌다. 나 이사는 “특히 ‘승리호’의 업동이는 배우의 캐릭터를 잘 살려낸 로봇을 보여준 점에서 의미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