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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작가 김희선의 기괴한 타임슬립...『빛과 영원의 시계방』으로의 초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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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뇌과학자로 환생한 신라의 승려, 헌책방 지하실에 타임머신을 만든 시계 수리공, 살아있는 자동인형을 찾는 정부 요원….

김희선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느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표출하는 문제의식은 무섭도록 현실을 파고든다. 그만큼 김희선은 허무맹랑한 상상에 현실의 잔혹함을 버무리는 데 능하다. 그 배경에는 약사(현실)와 소설가(비현실)로 양분된 그의 정체성이 있다.

새 SF 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출간한 김희선 작가. 현직 약사인 그는 소설가의 삶과 약사의 삶을 오간다. 우상조 기자

새 SF 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출간한 김희선 작가. 현직 약사인 그는 소설가의 삶과 약사의 삶을 오간다. 우상조 기자

약사이자 소설가인 김희선은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교육의 탄생'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 '공의 기원'으로 2019년 제10회 젊은작가상을, 같은 해 '해변의 묘지'로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난달 15일 나온 신작『빛과 영원의 시계방』(허블)은 현직 약사인 작가가 정밀한 과학적 토대 위에서 집필한 SF 단편 8편 모음집이다. 장편『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이후 1년여 만에 신작을 발표한 김희선을 지난달 23일 만났다.

김희선은 이번 소설집에 영향을 준 문학 작품으로 신라 향가 '제망매가'를 꼽았다. 그는 "'제망매가'의 화자가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면서 '미타찰'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는 구절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작품이 이번 소설집 중 '달을 멈추다'다. 생존이 어려워진 세상에서 인간의 뇌를 통째로 서버로 옮겨 영생을 누리려는 인물들을 그렸다.

김희선은 "불교의 극락세계인 '미타찰(彌陀刹)'에서,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 나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곳을 상상하게 됐다"며 "인간의 의식이 업로드된 거대한 서버 속 세상이라는 소설 배경으로 구체화됐다"고 소개했다.

SF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김희선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동안 그는 소설에서 노인 소외, 감염병, 과로사 같은 사회적 소재를 다뤄왔다. "강원도에서 약사로 살면서 젊은 사람보다 노인을 많이 만나게 된다"며 "어떤 분을 보면서 '저분은 무슨 사연이 있을까' 상상하는 버릇이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아드는 것 같다"고 했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에 실린 단편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배달노동자 문제를 다룬 '끝없는 우편배달부'라고 했다. "2018년 방사성 물질 라돈 검출 논란이 일었던 침대를 수거하던 50대 집배원이 과로 탓이었는지 돌연사하는 일이 있었다"며 "라돈 수치는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지만,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광풍이 불면서 침대 매트리스가 대거 수거됐고, 그 과정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물건을 옮기다 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고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단편 '가깝게 우리는'에는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종일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싱을 돌리는" 여공들이 등장한다. "라디오 전파에 세뇌당한" 여직공들이 야근 수당을 요구하면서 도시락을 앉아서 먹고 추가로 30분을 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자, 정부는 그들 대신 24시간 미싱을 돌릴 존재, '자동인형'을 찾아 나선다.

그의 이런 시선은 문학에 대한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문학의 목적"이라며 "작가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소설보다 세상 바깥으로 뻗치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김희선은 하루에 5시간만 잔다고 했다. 과로사 문제를 소설로 다루지만 정작 본인은 수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쓴다. "약사로 일하며 소설은 언제 쓰냐"고 묻자 "퇴근 이후 저녁부터 새벽까지"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새벽 3~4시까지 소설을 썼지만 앞으로는 건강 관리를 위해 취침 시간을 앞당기려고 한다"며 웃었다.

약사이자 소설가로 사는 것은 그에게 이중의 노동이 아니라 "한쪽의 스트레스를 다른 한쪽이 해소해주는 과정"이라고 했다. "약사 일을 하다가 소설을 쓰면서 머리를 식히고, 소설을 쓰다 약사 일을 하면서 머리를 식힌다"며 "소설은 허구를 지어내는 창의적인 작업이고 약 짓는 일은 엄밀한 조제법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양쪽 일을 번갈아가며 하는 것이 리프레시(refresh)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차기작은 초능력자 주인공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1960~197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재구성하고 싶다"며 "역사물이라기보다 개인이 겪은 특이한 경험을 통해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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