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尹 3.1절 기념사 컨셉은 ‘절제와 함축’…“기미독립선언에 모두 담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말을 줄이고 직접적인 언급도 피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는 과거사 문제 등 한·일 갈등 현안은 물론 양국 관계 발전 방향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다.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며 한·일 미래지향적 협력 필요성을 원론적인 차원에서 강조했을 뿐이다. 북핵 문제 등 안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도 이야기했지만, 그 주어는 한·일이 아닌 한·미·일 3국이었다.

"尹 모든 메시지, 기미독립선언에 담겨"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기념사를 통해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기념사를 통해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라는 내용으로 끝난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기념사 등을 통해 수차례 계승 의지를 강조한 선언문은 198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하지만 이번 기념사엔 김대중-오부치 선언 대신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인 기미독립선언 정신을 한·일 관계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관련 사정에 정통한 정부 소식통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과거사 문제 해결 등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 쪽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면, 기미독립선언은 한·일 관계를 대하는 현 정부의 마음가짐을 드러낸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3.1절 기념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은 기미독립선언에 담겼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이번 3.1절 기념사의 전반적인 컨셉 자체가 ‘절제와 함축’이었다. 직접적인 언급은 절제하되 의미가 함축된 표현을 사용하고, 이를 통해 한·일 양국이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뜻이 담긴 기념사”라고 설명했다.

尹 기미독립선언에 주목한 이유는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 제공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이 기미독립선언에 주목한 건 ▶원망·원한이 아닌 포용·화해 ▶세계평화와 인류번영 ▶정치권을 향한 당부 등 현 정부가 추구하는 대외 정책 기조와 대일(對日) 접근법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미독립선언엔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에 대입하면 과거사 문제의 책임을 물어 일본을 비난하는 대신 포용적 화해와 문제 해결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자유·인권·민주주의에 기반한 ‘가치 외교’를 강조하며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미독립선언에 담긴 “세계변화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자유권을 지켜서 풍유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라는 포부와 일치하는 외교 기조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공동명의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됐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민족대표 33인 공동명의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됐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제공

선언문엔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겠다”는 문구도 있다. 한·일 갈등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선 반일과 혐한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양국 정치인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윤 대통령의 평소 신념과 부합하는 내용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였던 2021년 11월 “국민을 친일·반일로 갈라 한일관계를 과거에 묶어 두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9부 능선 넘은 징용 협의…해법 발표 임박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독일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막판 협의를 했다. 외교부 제공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독일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막판 협의를 했다. 외교부 제공

윤 대통령이 한·일 현안에 대한 구체적 언급 대신 기미독립선언 계승 의지를 강조한 것은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 마련 절차가 9부 능선을 넘어 살얼음판을 걷듯 일본과 막판 협의를 진행 중인 상황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선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봤다. 외교부가 지난해 7월부터 4차례의 민관협의회와 공개 토론회를 개최하고 최근 징용 피해자 유족과의 비공개 집단면담을 가진 이유다.

정부는 그사이에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과 국장급 실무 협의를 지속했다. 지난달엔 급을 올려 차관·장관이 만나 강제징용 해법의 막판 쟁점을 논의했다. 외교가에선 국내 의견수렴과 일본과의 협의를 거쳐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가 임박했다는 분석이 많다.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1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한·일 간 현안의 조기 해결을 도모하기로 뜻이 재차 일치했고, 외교당국 간 의사소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