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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건설현장 폭력, 정부도 업계도 각성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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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인호 한국건설기술인협회 정책제도개선위원장

김인호 한국건설기술인협회 정책제도개선위원장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날씨가 풀린다는 경칩(驚蟄)에 이르러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건설업계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고 으스스함마저 감돈다. 공사 원가 상승으로 적자의 골이 깊어지는 와중에 가파른 금리 상승이 엄습했다. 자금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 주택 미분양 사태가 가중돼 중소·중견 건설업체의 연쇄 도산이 우려된다.

그나마 정부가 건설 현장 노조의 불법·폭력을 척결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난 21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건설 현장 불법·부당 행위 근절대책’을 보고한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강요·협박·뒷돈 등 불법행위를 ‘건설 현장 폭력, 즉 건폭(建暴)’이라고 언급했다. 엄정 단속해 법치를 확고히 세우라고 지시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도 검·경 합동 ‘건폭 수사단’ 출범 계획을 보고했다. 노조의 탈법에 대한 범정부적 대응을 천명한 것이다.

월례비 등 불법·부당 행위 많아
정부, 뒤늦게 적극적 대응 나서
탈법에 눈감아온 업계 반성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국토부 조사 결과를 보니 건설 현장은 무법천지와 다름이 없다. 건설사로부터 받는 뒷돈인 ‘월례비’로 타워크레인 기사 438명이 243억원의 불로소득을 챙겼다. 1인당 연평균 5500만원으로 국내 근로자 평균연봉(약 4000만원)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상위 20%(88명)의 연평균 수령액은 9500만원이고, 많게는 연간 2억2000만원을 받은 사례도 있다.

증빙자료가 있는 사안만 취합한 것이니 실제는 더 많을 것이다. 월례비 지급을 거부하면 자재 운반을 늦추는 등의 방식으로 태업을 불사했다. 결국 공사 차질로 인한 공기 지연은 건설사에 손실을 초래했고 초등학교 개교와 신규 아파트 입주 지연, 분양가 상승을 초래해 국민에게도 손해를 끼쳤다.

이런 현실을 감내하며 어떻게든 공기에 맞춰 공사를 마무리하려고 애썼을 건설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서두르다 사고가 발생하면 건설인은 여지없이 불법과 비리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다. 가혹한 처벌과 여론의 손가락질이 뒤따른다. 급기야 경영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중대재해처벌법까지 제정됐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사망자는 오히려 늘었다. 지난해 중대 재해로 숨진 근로자는 644명으로 1년 새 39명이 줄었지만, 법 적용 대상인 50인 이상 기업 사망자는 256명으로 8명이 늘었다. 근로자 희생도 줄이지 못하면서 경영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부과하는 불합리한 결과만 초래했다. 이 법은 충분한 숙의 없이 속전속결로 만들어져 적지 않은 허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모호한 규정과 과도한 조항을 보완해 중대 재해의 ‘처벌’이 아닌 ‘예방’으로 취지를 바꿔야 한다.

작금의 현실에 대해 정부는 뼈저리게 각성해야 한다. 건폭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때를 돌아보면 노조의 눈치를 과도하게 보며 편법을 눈감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라도 바로 잡겠다니 늦었지만 다행이다. 윤 대통령은 폭력과 불법을 보고서도 방치한다면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에 따라 강력히 조치하고 불법 상황이 다시는 벌어지지 못하도록 징벌적 손해배상을 포함하는 제반 사항을 법제화해야 한다.

부당한 실태에 대해 건설업계도 대오각성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법 행태를 유야무야하며 대충 넘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노조의 보복이 두려워 불법 행위를 신고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건설사의 의지가 없이는 불법 행위 근절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만년에 연암 박지원은 병든 몸으로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이라고 쓰고 이 여덟 글자 때문에 천하만사가 이지러지고 무너진다고 역설했다. 구습을 타파하지 않고 눈앞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인순고식(因循姑息)이다. 현실이 다급하니 이번만 넘기자는 것이 구차(苟且)이고 대충 모면하는 행태가 미봉(彌縫)이다. 구차미봉하면 결국 문제가 문제의 꼬리를 물고 퍼져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그동안 건설업계의 태도가 혹시 이렇지 않았는가 돌아봐야 한다. 건폭 척결을 계기로 건설인 스스로 자긍심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인호 한국건설기술인협회 정책제도개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