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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우크라 무기 지원, 기로에 선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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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인생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있다. 그 선택은 우리 인생을 확 바꿔놓을 수 있다. 미국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유대계 폴란드 여인 소피는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체포돼 어린 아들·딸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수용소 입구에서 독일군 장교는 두 아이 중에서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선택하라고 협박한다. 소피는 할 수 없이 병약한 딸을 선택하는데, 엄마 품에서 떨어져 독일군 장교의 손에 끌려가면서 소리 지르는 딸을 보며 소피는 오열한다. 이 사건은 소피가 평생 짊어져야 할 멍에로 남게 된다.

지난 1월 말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과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방한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보편적 가치 보호를 위해 나토와 협력하겠다던 한국 정부가 무기 지원을 거부했다며 비판적 기사를 썼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발다이 클럽 회의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면 양국 관계는 파탄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과의 군사 협력 가능성도 시사했다.

자유진영 도움 요청 외면 어려워
러시아 반발 완화할 대책도 필요
방어용 무기부터 지원 고려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는 이제 무기 지원 문제로 국제적 시험대에 선 양상이다. 소피의 선택은 양자택일의 선택이다. 소피가 아우슈비츠에서 직면한 난처한 상황이 대한민국 외교 앞에 놓인 셈이다. 한국이 서방의 민주주의 동맹을 따라 무기를 지원하면 러시아와의 관계가 파탄 날 수 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로 무산됐는데, 러시아는 더 나아가 북한이 필요한 미사일 기술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농축우라늄, 이차전지 원료와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희귀가스 공급을 러시아가 끊을 수도 있다. 반면 러시아를 의식해 서방의 무기 지원 요청을 거절해도 후폭풍이 클 수 있다. 서방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안보의 근간인 한·미 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정부의 가치외교·한미동맹 등을 고려할 때 시간이 갈수록 무기 지원 옵션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번 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의 향방이 가려지는 분기점이다. 전쟁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무기를 생산하는 방산 강국인 한국이 무기 지원을 거부하면 나중에 우리가 침략받을 때 나토가 무기 지원을 거부할 수 있다.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 과정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려면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이런 선택의 경우에도 한·러 관계가 파국으로 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외교적 노력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볼 때 나토가 간절히 바라는 포탄과 탄약 중심으로 미국 등을 통해 간접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 세계적 군비 축소 흐름 와중에도 포탄과 탄약을 대량으로 생산해온 국가는 남북한이다. 특히나 북한이 이미 러시아에 포탄·탄약 등 무기를 보내고 있다고 미국이 폭로한 마당에 동맹국인 미국 등에 포탄과 탄약을 판매하는 것은 명분이 있다.

무기를 지원하더라도 러시아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제적 무기 지원이 아니라 서방의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무기를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독일은 미국이 먼저 우크라이나에 전차 지원 발표해야 독일도 지원 가능하다고 고집해 결국 관철한 사례가 있다.

공격용 무기보다는 방어용 무기를 지원하는 것이 낫다. 서방도 전쟁 초기 확전을 우려해 주로 방어용 무기를 지원하다가 나중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했다. 무기를 지원할 경우 러시아의 경제 제재에 대비해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와 산업용 주요 원자재의 대체 공급처를 미리 확보해야 할 것이다.

소피의 선택 같은 양자택일이 가져올 충격은 향후 오랫동안 한국 외교·안보의 영향을 줄 수 있다. 중국이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할 가능성까지 제기돼 신냉전 구도가 더 고착할 수 있다. 이런 시점에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도움 요청을 마냥 외면하기 어렵다. 윤 정부가 지혜를 발휘해 가치외교가 직면한 시험대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