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 “하나의 유럽” 행진/CSCE 34국 정상회담 사흘 결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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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기감축·불가침선언 등 성과/「신질서 헌장」은 세계사에 큰 획/분쟁방지센터 중심 새 집단 안보체제 탄생할 듯
지난 며칠동안 세계의 이목을 파리로 집중시킨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 34개국 정상회담이 사흘간의 회의를 마치고 21일 폐막됐다.
정확하게 이틀반나절 동안 진행된 이번 회담의 내용 자체는 매우 단조로워 지루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열띤 토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숨가쁜 막후교섭 같은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비롯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34개 나라 수뇌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15분씩 연설하고 회의 마지막날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툼한 문서에 돌아가면서 사인한게 회의내용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은 처음부터 냉전 이후의 유럽 신질서를 모색하는 중요한 회의로 큰 관심을 모아왔다. 이번 파리회담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회담이 개막되던 날 아침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22개국 정상들은 유럽재래식무기(CFE) 감축협약과 상호 불가침선언에 서명,분쟁과 이념대치 및 군비경쟁의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이어 34개국 정상들은 2차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진 전후 얄타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평화·단결의 바탕 위에 신 시대를 다짐하는 「파리체제」의 큰 주춧돌 하나를 놓았다.
「파리헌장」이 바로 그 주춧돌이다.
CSCE 회원국 실무자들이 지난 6개월 동안 머리를 싸매고 매달려 완성한 이 문서는 금세기말과 다음 세기에 걸쳐 유럽질서가 바탕을 두게될 인간관계와 국가관계의 대본을 다루고 있다. 인권적 측면에서 본다면 「신 마그나카르타」(대헌장)가,국가간 협력 측면에서는 일종의 초국가유럽 헌법이 마련된 셈이다.
이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CSCE 참가국들은 인권·자유·민주주의·자유경제 등 공동의 가치 수호에 진력할 것을 엄숙히 서약하는 한편 안보와 단결을 위해서도 상호 협력하기로 다짐했다.
더욱이 각국의 군사정보에 관한 데이타뱅크와 통신망까지 갖추게 되면 결국 분쟁방지센터를 핵으로 유럽 전체의 새로운 집단안보 장치가 탄생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CSCE 회의에 참석한 동구의 여러 지도자들은 최근 급속히 높아지고 있는 인종적·민족적 갈등에 큰 우려를 나타내고,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또 이들 동구국들은 한결같이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이념적 분단에 이은 유럽의 경제적 분단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어째서 「파리헌장」의 많은 부분이 동·서 유럽의 통합과정에서 발견되는 각종 문제점과 부작용을 극복하는데 바쳐지고 있는지를 이번 회담에 참가한 당사국 정상들이 직접 설명한 셈이다.
나폴레옹전쟁 이후의 유럽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던 1814년의 빈회담이 오늘의 역사책에 중요한 회의로 기록돼 있듯이 지난 19일부터 사흘동안 열린 이번 CSCE 파리회담 또한 한시대에 획을 그은 역사적 회담으로 후세의 역사책에 기록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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