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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집으로, 엄마는 직장으로…가사 전담 남성 20만 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이에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물어보면 무조건 ‘아빠’라고 해요.”

인천에 살고 있는 윤큰별(39)씨는 웃으며 말했다. 윤씨는 2020년 기간제 교사 일을 그만두고 3년째 집에서 가사를 전담하며 38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다. 그는 “주변에서 반대도 심했고 정교사인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때부터 ‘돈은 나중에 또 벌어도 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며 오래 설득을 했다. 지금은 아내가 더 좋아한다. 저도 아내도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7홀에서 열린 제43회 맘앤베이비엑스포에서 관람객들이 유아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7홀에서 열린 제43회 맘앤베이비엑스포에서 관람객들이 유아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게임회사 개발자인 이승빈(41)씨는 곧 회사에서 퇴직한다. 대신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8살 첫째와 6월 태어나는 둘째 육아를 전담하기로 했다. 양가 모두 아이를 봐주기 어려운 상황이라 정보기술(IT)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는 아내와 상의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이씨는 “돈을 벌고 가족을 지키기만 하면 좋은 아빠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 6개월 육아 휴직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며 “직접 아이를 돌보면서 가정의 중심을 잡는 게 좋겠다 싶어 퇴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윤씨나 이씨처럼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남성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22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올 1월 ‘육아’를 이유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비경제활동인구) 남성은 1만7000명이다. 1999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가장 많았다. 1년 전(1만4000명)보다 3000명(21.4%) 늘었다.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육아 휴직 중인 사람(일시 휴직자)은 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 통계에 포함하지 않는다. 남성 육아 휴직자는 지난해 3만8000명으로, 이 인원까지 포함하면 실제 육아를 전담 중인 남성 수는 더 많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유가 ‘가사’라고 답한 남성 수는 올 1월 21만5000명에 이른다. 2003년(동월 기준)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지난해 12월 20만5000명으로 20만 명 선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상승세다. 외환위기ㆍ카드사태로 실직자가 넘쳐나면서 가사 남성이 일시적으로 급증했던 1999~2003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전담하는 남성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반면 전업주부 여성은 줄고 있다. 올 1월 기준 육아ㆍ가사를 이유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 인구는 698만1000명으로 1년 전 709만6000명에서 11만5000명(1.6%) 감소했다. 2013년(동월 기준) 777만7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을 걷고 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부장제 규범에 따른 전형적 성별 분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해체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젊은층 사이 역할 분담, 평등 의식이 높아지고 있고 육아ㆍ가사에 대한 남성의 관심 역시 늘고 있는 최근 세태를 반영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하지만 아직까진 ‘찻잔 속 태풍’이다. 여전히 여성 전업주부 수가 남성의 30배를 넘을 만큼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엄마에 초점이 맞춰진 육아ㆍ가사 공적 지원, 사회적 시선, 경제적 어려움 등 ‘전업 남편’이 부딪히는 현실의 벽은 여전히 크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경력 단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가임 기간 낳는 아이 수)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0.78명으로 추락한 상황에서 남자든, 여자든 원하는 사람이 맘 편하게 육아ㆍ가사를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전문가는 입을 모은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맞벌이가 어려우면 소득 높은 사람이 일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며 “그런데 여성의 사회 진출, 근로소득이 증가하고 있지만 남성의 돌봄ㆍ가사 전담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고 희망적으로 보기에도 이르다”고 했다. 이어 그는 “육아 휴직은 짧게, 유연 탄력 근무는 길게 하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성별 상관없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유도하는 서유럽 국가의 방향으로 가는 게 필요하다”고 짚었다. 석재은 교수도 “(공공기관ㆍ대기업 같은) 안정된 근로 집단만이 아니라 모든 엄마ㆍ아빠가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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