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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겼어"…어리둥절하던 동성 커플 눈물 터뜨렸다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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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 1심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 건강보험공단이 원고 소성욱씨에 대하여 한 보험료 부과처분을 취소한다. 소송 총 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동성끼리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며 서로 부양하고 있다면 이성 사실혼 부부와 다를 바 없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사진은 소성욱·김용민 부부의 2019년 결혼식 당시의 모습.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제공]

동성끼리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며 서로 부양하고 있다면 이성 사실혼 부부와 다를 바 없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사진은 소성욱·김용민 부부의 2019년 결혼식 당시의 모습.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제공]

21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대법정. 행정1-3부(부장 이승한·심준보·김종호)는 ‘동성 결합’에도 부부와 같은 권리를 인정한 판결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내놨다. 세 문장으로 끝난 선고에 소성욱씨와 그의 남편 김용민씨는 어리둥절해 했다. 함께 온 이호림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네트워크 활동가가 뒤에서 달려와 “이겼어, 우리가 이긴 거야” 하니 그제야 눈물을 터뜨렸다.

이날 판결은 민법상 부부의 개념에 동성도 포함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소송은 소씨가 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보험료 부과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것이다. 건보공단은 법적 부부가 아닌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등록해 보험료를 내지 않고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같은 논리로 소씨도 김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해줘야 한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소씨 부부를 사실혼 관계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사실혼에 비해 동성결합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는 ‘동성 부부’나 ‘동성 사실혼 배우자’란 표현 대신 ‘동성결합’이라는 말을 썼다. “아직 동성 간 혼인 또는 사실혼이 인정되지 않는 현행법 하에서 이런 표현은 개념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동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사실혼과 같은 생활공동체 관계를 동성결합이라 부르기로 한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걸 금지하는 평등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건보공단이 본질적으로 같은 집단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대우’를 했다고 봤다. “혼인의 실질에 대응하는 합의하에혼인의 실질에 대응하는 밀접한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관계에 있고,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혼 배우자 집단과 동성결합 상대방 집단은 성적 지향에 따라 상대방이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라는 판단이다.

지난해 1월 행정법원 패소 당시(위 사진)와 이를 뒤집는 서울고법 선고가 나온 21일 소성욱 씨 부부의 모습(아래 사진). 연합뉴스, 문현경 기자

지난해 1월 행정법원 패소 당시(위 사진)와 이를 뒤집는 서울고법 선고가 나온 21일 소성욱 씨 부부의 모습(아래 사진). 연합뉴스, 문현경 기자

2019년 5월 교제 7년 만에 김씨와 결혼식을 올린 소씨는 2020년 2월 건보 홈페이지에 동성 커플임을 알리며 피부양자 등록을 문의했다.  다음 날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어 보름 후 피부양자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건보는 그해 10월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착오 처리로 소씨를 피부양자 등록했다”며 소씨의 자격을 소급해 없애고, 지역가입자로 바꿔놓았다.

소씨는 이를 다시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고 긴 싸움이 시작됐다. 지난해 1심에서는 “아직 입법이 없는 상태에서 해석만으로 혼인의 의미를 동성 간 결합에까지 확대할 수 없다”며 건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선고엔 많은 취재진이 몰렸고 짧은 선고 뒤엔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소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단은 제가 남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저주당할 것도, 외면당하거나 욕을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 정말로 기쁘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소씨·김씨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이들의 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 소씨의 대리인단 중 한 명인 류민희 변호사는 “반차별의 원칙, 평등의 원칙에 기반해 똑같이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주어지지 않아 소송을 내게 되는 경우 이번 판결이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날 판결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대법원에서 다시 다툴 것으로 보인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입장을 정리중이며, 상고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법원도 이날 고등법원 판결과 같은 취지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면, 이는 향후 비슷한 소송에서 일종의 지침이 된다.

'사실혼은 아니지만, 차별은 안 돼' 법원 판단 왜?…판결문 말미 설명 보니

추가로 어떠한 차별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간략하게 덧붙이고자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각국에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와 같은 성적 지향 소수자들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차별이 존재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 지향은 선택이 아닌 타고난 본성으로, 이를 근거로 성격, 감정, 지능, 능력, 행위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의 평가에 있어 차별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고, 그에 따라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기존의 차별들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남아있는 차별들도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다. (...)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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