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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1년, 한국의 생존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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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수 전 주독일 대사·한국외교협회 부회장

이경수 전 주독일 대사·한국외교협회 부회장

개전 1년째를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대전 종전과 탈냉전 시기를 거쳐 형성된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변곡점이 되었다. 먼저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추구로 국경 불가침의 국제 규범이 무시되고 제국주의 원리가 회귀하였다. 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분쟁·이해 당사자가 될 경우 국제 평화와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유엔 집단안보 체제의 근간이 훼손되었다. 억지력으로만 작동했던 핵무기가 사용 가능성의 영역에 진입함으로써 핵전쟁의 금기도 깨졌다.

지역·경제 블록별 각자도생 가속
한국은 자유주의 질서의 수혜자
북핵 위협에 동맹·연대 강화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자유주의가 제공한 국제질서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세계화의 혜택과 안보를 누려온 온 한국에는 충격이다. 자국 중심주의와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공급망 혼란,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세계가 서로 얽혀 사투를 벌이는 ‘3차 대전적 상황’을 만들었다. 많은 나라가 강대국 간 경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설 수도, 독자 생존을 모색할 수도 없는 전략적 딜레마에 빠졌다.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가 그 변화를 초래한 원인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세력 균형, 강대국 간 세력권 분할, 합종연횡, 패권 형성, 전쟁이 작동 원리가 되는 ‘홉스적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념·가치에 따라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이 결집하며, 이해에 따라 지역별·기능별 블록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각자도생 양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유 세계가 전환적 궤도 수정에 들어선 것은 긍정적 진전이다. 미국은 ‘트럼피즘’과 경제의 상호의존성 속에서도 큰 방향에서 사고와 정책 변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이 민주화하거나 국제질서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가치·자유 연대와 동맹 구축을 기초로 규범 기반 국제질서 회복에 나섰다. 독일·프랑스 등은 대화·경협·무역에 의존한 ‘중단 없는 동방정책’과 러시아에 대한 ‘포용적 문화정책’에서 탈피해 하드파워 중심의 ‘시대 전환’을 선언했다. 한국도 북한의 선의에 의존해 핵 무력 완성의 길을 막지 못한 ‘실존적 안보 위기’에 처해 ‘실존적 대응’에 나섰으며, 자유 세계 연대와 자유·평화·번영의 지역 질서에 동참하는 결단을 내렸다.

특수한 지정학적 환경에 처한 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 과정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그 어느 나라보다 명백한 입장과 인식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직시하면서 원칙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안보를 강화하는 길이다.

첫째,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강대국 간 세력권 분할의 피해자로서 그 결과인 분단을 겪고 있다. 한국이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다.

둘째, 소련과 그 후신인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팽창주의 세력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와 친소 정권 수립, 북한의 6·25 전쟁 계획 승인과 군사적 지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과거 소련의 한반도 무력 개입의 데자뷔로, 한반도와 접경한 러시아가 유사시 ‘안보 불안’을 이유로 한반도에 개입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북한의 그릇된 학습 위험성이다. 북한의 지난해 9월 핵무력정책법은 러시아의 2020년 6월 ‘국가 핵전략 기본원칙’을 답습한 핵 독트린이다. 제3국 개입 시 핵 위협을 경고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일 연설은 김정은에게 자신도 결정적 패배나 정권 교체 등 ‘실존적 위협’ 상황에서 핵무기를 선제 사용할 수 있음을 밝힌 동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향배를 지켜보고 있을 김정은이 러시아의 전술핵 사용이 현실이 될 경우 한반도에서도 핵 단추를 누를 수 있다. 넷째,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문화를 부인하며 자행한 러시아의 침공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 영토주의’에 입각한 한반도 연고 주장과 중화주의 욕망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자유 세계 연대와 한·미 동맹 속에서 안보와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은 전후 국제질서 원리가 만들어 낸 최상의 결과물이다. 이제 다시 시작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형성에 참여하는 것은 또 하나의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한국의 생존 전략이며 비전이 돼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국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경수 전주독일대사·한국외교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