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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순혈주의자와 ‘헤어질 결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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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호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 제주도 대정의 산방사(山房寺) 앞바다에 네덜란드의 상선 한 척이 표착했다. 하멜(H. Hamel)을 비롯한 64명이 그 배에 타고 있었는데, 상륙하면서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 14년의 노비 생활을 하다가 생존자 8명이 1차로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나머지 남원과 순천에 잔류했던 8명은 네덜란드가 일본 막부 정권에 호소하여 2차로 귀국했다. 생존자 36명 가운데 16명이 귀국했으면 20명이 남았는데,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일부는 병으로 일찍 죽었지만 유일하게 이름이 남아있는 클라츠(Jan Claetz) 등 대부분은 한국인과 결혼하여 처자식을 두고 있던 터라 귀국을 거절하고 조선에 남아 일생을 마쳤다.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천민과 결혼을 했으므로 그 뒤의 혈족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후손이 대대로 한국인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한국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란 점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단군자손만이 동포인 시대 지나
출산율 높아져도 일손 부족 여전
순혈주의라는 미망에서 깨어나
일정 수준 이민자 받아들여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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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하멜 표류기를 거론한 것은 민족이라는 존재가 오직 핏줄뿐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다. 한때 고전파 민족주의자들은 핏줄을 민족의 첫 번째 구성 요소로 들었다. 그러나 세계가 넓어지고 국경의 의미가 축소되는 지금의 역사학에서는 핏줄보다 언어와 주거의 동시성을 우선적인 요소로 꼽는다. 이에 따른 구별로 보면 언어를 잊은 다른 국적의 형제는 그저 혈연일 뿐 한민족이 아니며, 차라리 우리와 고락을 함께하며 같은 문화와 언어를 쓰는 김인순씨(가수 인순이)나 하일씨(방송인 로버트 하일)가 우리의 동포라 할 수 있다. 국조가 단군(檀君)임은 틀림없지만, 단군의 자손만이 우리의 동포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근거리화된 국가에서 이제 동족이니 동포니 하는 개념은 점차 퇴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동포의 숫자마저 감소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호왈 5150만 명의 인구는 이제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지금 세계 10대 강국의 하나로 올라섰다고들 한다.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1억 이상의 인구, 3만 달러 이상의 국민소득, 50만㎢ 이상의 국토 등의 규모적 요인과 핵무기 보유로 대표되는 군사력, 고도의 문자해득률로 상징되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준에서 국민소득과 문자해득률을 빼고 나면 강대국이라 할 수 없다. 위의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구밖에 없다.

바로 그 인구 문제에서 우리는 절벽 앞에 섰다. 인구가 감소하지 않으려면 출산율이 2.1을 넘어서야 하는데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0.808명이다. 거기에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께는 조심스럽지만 성경에 따르면 창조주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아기 많이 낳아라”(창세기 1 : 28)는 것이었고, “나쁘다”는 의미의 말씀을 처음 한 것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기 2 : 18)였다. 지금 인간은 창조주의 계명 두 가지를 모두 어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해야 하나. 이룰 수 없는 소망이지만, 지금부터 갑작스레 출산율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새로 태어난 세대가 경제 활동에 참여하게 될 25년 뒤까지 우리는 ‘실업율은 높은데 일손이 부족한’ 기이한 사회에 살게 될 것이다. 인구가 점차 늘어나리라는 낙관론이 현실로 이뤄진다 하더라도 최소 25년의 ‘불임(不姙)의 시대’를 어떻게 견뎌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이민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길에는 좀처럼 뛰어넘기 힘든 험난한 장벽이 있다. 다름 아닌 순혈주의(純血主義)다. 이는 참으로 근거 없는 미망(迷妄)이며 깨어나야 할 신화이다. 빈번한 전쟁은 많은 혼혈을 낳았다. 이 지구상에 순혈 민족은 없다. 순혈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우리 민족도 알고 보면 30개 민족의 혼혈로 이뤄져 있다. 더구나 우리의 순혈주의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감(xenophobia)이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다. 백색인종에 대해서는 이국정취(xenophilia)를 느끼면서도 유독 유색인종에 대한 기피가 심하다는 의미다. 나는 이런 의식이 일본 통치의 유산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일본은 하체가 발달하지 않은 남방계이므로 백색인종과의 혼혈을 통해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극우파 자객에게 살해당한 도쿄제국대학 초대 총장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에게서 일본인이 갖고 있던 극단적 유색인종 혐오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D라 불리는 기피 업종의 인력 부족을 채우는 차원이 아니라 최소한의 문자와 한국어를 이해하여 문화 충격을 흡인하는 수준의 지식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요구하는 문화의 수준이라 함은 문맹의 가늠자인 ‘8학년 이상의 한국학 교육을 받은 정도’를 의미한다. 지금 한국 땅에는 여행자를 제외하고서도 225만명의 외국인이 상주하고 있다. 5150만 인구의 4.4%에 이르는 수치다. 이제 순혈주의나 유색인종 기피심리는 잊어야 한다. 이미 19세 이하의 학생 가운데 30%가 다문화가정 태생인데 무엇을 더 주저하고 있는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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