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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YS·DJ의 연합적 민주주의, 오늘날 더욱 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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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을 맞아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올해로 문민 민주주의 30주년을 맞는다. 1993년 2월 한국은 30년에 걸친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를 끝내고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민주화를 위한 오랜 국민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민주주의와 함께, 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선진국 진입을 이루어내었다. 군사권위주의 시기에 빈곤국가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한 데 이은 일대 성취였다. 위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분출하는 민주정부의 교체와 함께 선진국 진입을 이루었으니 한국민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여, 오늘의 시점에 민주화를 이룬 대전환기의 몇몇 핵심 단면과 유산을 돌아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오늘을 위한 지혜와 해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군부의 정치개입부터 막아

가장 높게 평가해야 할 성취는 군부 권위주의 유산의 극복이었다. 민주화로의 물결이 다시는 역진되지 않도록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확실히 통과한 것이었다. 정치군부의 전격적인 제거와 쿠데타 세력 처벌을 통한 나라의 문민화, 즉 탈군부개혁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최대 업적이었다. 민주화의 임계점과 회귀불능점(回歸不能點)을 확고부동하게 넘은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동남아·중앙아시아·중동·북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민주화 이후 극도의 정치 불안정에 빠져들거나 만성 소요사태, 또는 군부의 재집권을 허용한 민주주의 역진 경로를 밟은 사례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철저한 군부 유산 극복과 병영으로의 복귀는 놀라운 것이었다.

군부의 긴 정치참여와 집권경험, 거대한 규모와 정보력, 분단과 남북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군부가 다시는 정치개입을 상상할 수조차 없도록 국가수호에만 전념하게 완전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한국은 군부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들의 경제발전 업적이 절대 작지 않았다. 그것을 안고 넘어 정치로부터 군부를 퇴출해 본연의 위상과 역할을 회복한 것이었다.

군부혁파, 지역균형발전 이룬 YS
경쟁자 DJ 대우하며 개혁 이끌어

YS의 정책 이어받아 꽃 피운 DJ
정보화·복지·남북관계 등 앞당겨

극단적 진영주의에 갇힌 정치판
민주화 초기 정신 거울로 삼아야

5·18특별법 제정한 김영삼 정부

1987년 7월 10일 통일민주당사 입주식에서 김영삼 총재(오른쪽)와 김대중 고문이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7월 10일 통일민주당사 입주식에서 김영삼 총재(오른쪽)와 김대중 고문이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지역화합과 균형발전 역시 초기 한국 민주정부의 업적이었다. 호남 고립과 지역 대결구도의 악화를 초래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은 3당합당을 통해 집권한 이후 김영삼의 경로는 반대였다. 12·12쿠데타 단죄와 하나회 척결로 영남 TK에 기반을 둔 정치군부를 퇴출시킴은 물론 쿠데타 세력의 정점에 있던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였다.

그것은 광주에서의 시민학살 책임에 대한 단죄의 의미를 함께 담는다. 5·18특별법 제정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위상을 확고히 한 것도 김영삼 정부였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 요구의 불수용을 통한 민주선거의 보장 역시 지역과 진영, 검찰의 정치개입과 사법주의를 넘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의 정상 절차를 보장한 결단이었다.

하나회 숙청과 정치군부 처벌을 통한 김대중에 대한 강고한 비토세력 제거, 5·18특별법 제정을 통한 포용과 연대, 비자금 수사 수용거부를 통한 민주선거 보장은 한국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한 토대를 놓았음이 틀림없었다.

영남 홀대론, 호남 홀대론 없애

지역균형발전 역시 주목해야 한다. 예산과 자원 배분을 말한다. 지역총생산을 기준으로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호남지역의 성장은 전국 평균보다 19.82%가 더 높았다. 반면 영남지역은 전국 평균보다 2%가 높았고, 호남보다는 17.81%가 낮았다. 김영삼 정부는 영남 편중적인 자원배분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김대중 정부는 호남 편중적인 자원 배분을 하지 않았다. 당시 호남은 전국 평균보다 9.37%가 낮았다. 반면 영남은 전국보다 7.71%가 낮았고 호남보다는 1.66%가 높았다.

객관적 지표로 볼 때 초기 민주정부와 지도자들에 대한 기존의 강한 지역주의적 시각과 의심은 우리 자신의 집단적인 감정적 편견과 오해였다.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평가가 아닌 것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영남 편중과 호남 홀대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호남 편중과 영남 홀대 역시 없었다. 지역을 대표한 지도자들의 보편적 민주주의 가치와 정책을 통해 지역 대결정치의 한 축이 해체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역정치의 희생자이자 수혜자인 동시에 파괴자였다.

정치와 정책의 연속성과 지속성 역시 매우 중요하였다. 연합적 민주주의의 뚜렷한 산물이었다. ‘제2의 건국’ ‘생산적 복지’처럼 김영삼과 김대중은 어떤 부분은 용어까지 동일하였다. 예산과 R&D는 물론 기구·법령·정책을 살펴볼 때 오늘날 한국이 세계 선두에 서 있는 정보화·IT·디지털 강국 건설은 지도자들의 비전과 집념의 연속이 이루어낸 산물이었다. 즉 김영삼의 ‘씨앗 뿌리기’, 김대중의 ‘뿌리내리기’와 ‘줄기 세우기’, 그리고 노무현의 ‘날개 달기’가 이어짐으로써 가능하였다. 제2의 산업화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 성공 분야인 정보화는 국정의 연속성을 통한 대표적 성공 사례였다.

김영삼은 개척자, 김대중은 완성자

이들 영역에서 한 사람이 개척자였다면 한 사람은 완성자였다. 오늘날 정보화, IT산업, 생산적 복지, 베를린 선언,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한 많은 성취는 김대중에 대한 대중적 기억과 유산이 더 크고 더 강하다. 그가 계승·확장·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개척자의 기여가 축소되거나 완성자의 성취가 독점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위대한 개척이고 위대한 완성이다.

자기 읍참을 통한 청렴과 부패청산 노력 역시 동일하였다. 한 사람은 임기 중 자식을 구속한 첫 대통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식 둘을 구속하였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 자신과 공직자 재산등록과 공개, 전직 대통령 부패처벌을 포함하여 청렴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경쟁자들을 이러한 문제로 처벌하지 않았다. 정치의 최소 덕목이었다. 정치적 경쟁자를 억압하고 처벌하는 대신, 자기 쪽을 향한 엄격성과 반대쪽을 향한 연합의 정신은 조각권 이양과 대연정을 제안한 노무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이전에는 ‘연합적 경쟁’의 정치를 통해 민주화를 위해 매진하였다. 그것은 당내 후보 경쟁, 민주화 조직(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개헌운동, 선명 야당 창당을 통해 지속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경쟁적 연합’의 정치를 보여주었다. 집권과정에서는 독자 출마, 3당 합당, DJP 연합, 내각제 합의와 파기가 대표적이었다.

DJ에 각료 추천 제안한 YS

그러나 집권 이후 ‘경쟁적 연합’의 정치는 달랐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각료 추천을 제안하고, 패배 후 출국할 때는 현지 대사에게 최고 예우를 지시하였다. 5·18특별법의 제정은 광주정신 및 김대중과의 공동 원칙을 의미했다. 비자금 사건처리도 공통의 민주주의 문제였다. 또, 김대중은 김영삼의 많은 정책을 이어받고 꽃을 피웠다.

반면, 타협과 연합과 지속성이 확보되지 못한 영역의 유산은 정반대였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및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노동을 포함한 사회경제 개혁 분야의 실패와 외환위기가 대표적이었다.

한반도 비핵평화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말할 필요도 없이 두 지도자 각각의 정치와 업적은 독자적으로 평가받아아 한다. 서로 다른 비전과 정책의 존재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

타협과 연속성의 공동 성취

그러나 국가공동체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타협과 연속성이 가져다준 공동의 성취에 대해서는 균형의 눈이 꼭 필요하다. 민주화 초기 중심적인 두 균열계선이었던 문민 대 군부, 지역 대 지역 구도 문제에서 시대 과제 돌파와 국민통합의 계기를 마련한 철학과 정책은 오늘의 진영 대결에 대한 바른 해법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연합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모든 나라는 위기 시점에 초기 출발의 정신과 가치, 성취와 실패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결정적인 세 시초를 갖고 있다. 민주화 초기의 연합적 민주주의를 통해 시대 의제를 넘고 오늘의 틀을 정초했던 경로를 돌아보자.

지금 우리는 극단적인 진영대결과 승자독식 민주주의의 망국적 폐해를 절감하고 있다. 민주화 초기의 연합적 민주주의 정신과 정치를 돌아보길 호소한다. 문민정부 30주년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