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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적 아내 그딴 것 안 하겠다” 세 자매 작가의 절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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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웨이스티드’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내 경험이라곤 가정교사 해본 게 전부인데… 그런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도 쓰지 않아.”(앤)

“그럼 너가 써!”(샬럿)

뮤지컬 ‘웨이스티드’에서 여성작가 샬럿과 앤 브론테 자매의 대화 한토막이다. 최근 관람한 모든 공연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연대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이 가능했을까. 아니, 전에 없던 일이라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로맨스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한 손으로 반죽, 한 손으로 글 쓴 자매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프라이드’ ‘킬미나우’ ‘엠 버터플라이’ 등 해외의 최신 웰메이드 연극을 꾸준히 소개하며 사회적 화두를 던져온 연극열전이 드물게 선보인 뮤지컬 장르다. 연극 ‘타조 소년들’의 칼 밀러 작가와 올리비에상 수상작인 뮤지컬 ‘쇼 스토퍼’에 참여한 작곡가 크리스토퍼 애쉬가 2018년 영국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를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총칼보다 위대한 펜의 힘을 대변하는 말이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지금도 변치 않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삶과 작품 속 세계관을 연결한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최근 국내에서 이상이·김유정·정소민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개막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국에 위대한 작가가 셰익스피어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이 작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한손으로 반죽을 하고, 한손으로 글을 쓰며’ 다 함께 작가가 된 세 자매가 있었다. 『제인 에어』를 쓴 샬럿과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를 쓴 앤까지, ‘브론테 세 자매’다. 대중성이 뛰어난 ‘베스트셀러’를 남기지 못한 앤은 언니들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지만, 여성차별과 계급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작품을 써서 영문학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브론테 자매의 외침을 담은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사진 연극열전]

빅토리아 시대 여성 작가를 다룬 뮤지컬은 더러 있었다. 지난해 같은 소재의 ‘브론테’라는 창작 뮤지컬이 공연됐고, 오는 3월 재공연 예정인 ‘레드북’은 2016년 초연 당시 뮤지컬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되던 여성상을 깨뜨린 것으로 유명하다. ‘레드북’은 심지어 그 시대에 ‘빨간 책’을 쓰는 여자가 온갖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인데, 위기의 순간 백마 탄 남주인공의 든든한 지원사격 덕분에 해피엔딩을 맞는 로맨틱 코미디다. 반면 ‘웨이스티드’는 설탕 코팅이라곤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어 결이 전혀 다르다.

무대는 샬럿 브론테나 필명인 커러 벨이 아닌 ‘아서 니콜스 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샬럿의 인터뷰로 막을 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브론테 자매가 활동했던 19세기, 급격한 산업화에 직면한 영국에서 노동의 기회를 쟁취하거나 글로써 사회를 응시하는 문학은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에게는 가정을 휴식과 회복의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이 주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글재주를 가져봤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은 시작점부터 달랐다. 일단 부엌에서 반죽부터 하는 게 의무였다.

연출·음악감독·배우도 여성이 대세

1835년경에 브론테 자매의 남동생인 브랜웰 브론테가 그린 자매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1835년경에 브론테 자매의 남동생인 브랜웰 브론테가 그린 자매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브론테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뭐가 됐든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했던 브랜웰과 달리, 누이들은 “순종적 아내 그딴 것 안 하겠다”고 외치는 게 먼저였다. 1846년 샬롯과 에밀리, 앤이 각각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이라는 남자 필명으로 함께 자비 출판한 시집은 딱 2권 팔렸다고 한다. 다음해 각자 출간한 소설도 악평에 시달렸고, 자매는 생전에 영광을 보지 못하고 모두 요절했다.

작가도 작곡가도 남성이지만, 무대는 여성들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박소영 연출, 이나영 음악감독 등 제작진부터 배우, 객석까지 여성이 대세다. ‘록 다큐멘터리 뮤지컬’이라는 독특한 형식 아래 펜 대신 마이크를 권총처럼 하나씩 찬 여자들의 샤우팅으로 무대는 시종 부글부글 끓는다. 뮤지컬이지만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를 즐기기 위한 무대가 전혀 아니다. 주류 사회에서 외면당해 온 여성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절규와 외침이 노래가 됐을 뿐이다.

스타 캐스팅도 아니고 대학로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연·백은혜 등 낯선 이름의 여배우들이 주인공인데도 MZ세대 여성 관객으로 객석에 빈틈을 찾기 어렵다. 90%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 관객들은 세 여배우가 잠시도 숨돌릴 틈 없이 무대를 뛰어 다니며 록 스피릿을 불태우는 퍼포먼스에 150분간 꼼짝도 않고 집중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터뜨리는 열광적 환호엔 국내 최장수 스테디셀러 뮤지컬 반열에 오른 ‘헤드윅’ 만큼이나 뜨거운 응원의 기운이 느껴진다.

왜 이렇게 뜨거울까. “달걀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운명은 전갈 한 마리를 올려놓곤 하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난 실패자.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고, 아무것도 못되고 죽었어.” 이런 푸념 끝에 세 자매가 던지는 “그럼 내 존재 자체가 헛됐어?”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 아닐까.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후대에 영문학 최초로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 소설들로 평가받았지만, 종종 단순한 막장 로맨스 소설로 폄훼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운 여성이 얼마나 많을까. 세 자매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무대를 향한 대중의 환호도 그 ‘헛되지 않은 평범함’을 향한 헌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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