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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공부 위해 게이 연기까지, 몸으로 이야기하는 춤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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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더 룸’ 안무·연출 무용가 김설진  

5년만에 재공연되는 국립무용단 ‘더 룸’. [사진 국립무용단]

5년만에 재공연되는 국립무용단 ‘더 룸’. [사진 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의 ‘더 룸’은 2018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99.5%를 기록했던 흥행작이다. ‘벨기에의 보석’으로 불리는 피핑톰 무용단에서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최고의 현대무용가이자 춤 서바이벌 ‘댄싱9’의 스타 춤꾼 김설진이 안무와 연출을 맡아 가장 ‘국립무용단스럽지 않은’ 공연을 만들어 화제였다. 5년만의 재공연(3월 2~4일)도 진작부터 매진됐다.

춤 서바이벌 ‘댄싱9’ 우승으로 주목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움직이는 초현실주의 회화랄까. 김설진은 맨몸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을 부리는 피핑톰 출신답게, 정직한 춤만 추던 한국무용가들을 거짓말같은 초현실의 세계로 초대했다. 무대 위의 방은 그저 방이 아니다. 머물렀던 사람에 관한 기억을 토해내는 비밀스런 이야기보따리다.

“전부터 사람을 지배하는 것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이나 죽음에 대한 작품도 많이 했죠. 더 커다란 뭔가를 찾다가 어느 날 호텔에서 ‘기억’을 떠올렸어요. 내가 오기 전에는 누가 다녀갔고 다음에는 누가 올까, 이 공간은 비밀스런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겠지. 나라는 방 안에도 여러 사람이 스쳐지나간 것 아닌가, 싶더군요. 그런 이상한 생각을 막 할 때쯤 이 작업을 하게 됐어요.”

김현숙·김미애·황용천·최호종 등 국립무용단원들이 처음으로 자신이 꺼낸 이야기로 소설 쓰듯 창작에 참여했기에 더욱 특별해진 무대다. “안무가 타이틀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무용수들이 다 크리에이터로 참여했으니까요. 저는 연출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그냥 ‘잘하는 춤 추세요’는 아니었어요. ‘이런 걸 이야기하려는데 어떤 움직임이 좋은지 찾아봅시다’로 시작해서 계속 주고받으며 발전시켜 나간 것이죠. 오히려 일방적으로 동작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예요.”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한국무용가들과의 작업이라고 장르에 구애받진 않았다. 그저 ‘방이 품고 있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테마를 한국무용가들과 함께 펼쳤을 뿐이다. “내가 한국무용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한국무용가들은 어떤 걸 해야 한다는 건 좀 오만한 생각 같았어요. 오랫동안 한국무용을 추셨으니 자연스럽게 나올테고, 저는 개개인에게서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어요. 물론 초반에는 그들이 신성시하는 걸 깨는 게 힘든 부분도 있었죠. 태평무를 추는데 옆에서 산만하게 움직이는 걸 거슬려 한다거나. 그럴 때 여기서 태평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거라는 설득이 필요했어요.”

그는 애초에 ‘한국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본 적 없다. 국악, 스트릿댄스 등과 곧잘 협업하지만, 유행을 좇는 게 아니라 그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냥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스트릿으로 춤을 시작했는데 MC 해머가 유행할 때 영화 ‘서편제’가 나왔고, 마이클 잭슨 공연에 감탄하면서 공옥진 공연 보며 울었고요. 제가 생각하는 한국적이란 건 전통과는 달라요. 경복궁이 아니라 광화문 뒷골목이 진짜 한국적이지 않나요. 경복궁과 증권가 빌딩이 같이 보이고, 폐지 줍는 리어카 옆으로 벤틀리가 지나가는 식이죠.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버리지 못한 것, 지키지 못한 것이 막 섞여있는 카오스. 이런 나라는 한국 밖에 없잖아요.”

폐지 리어카 옆 벤틀리, 그게 한국적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배우로도 활약중인 김설진은 춤추는 순간 가장 편안해 보였다. 김상선 기자

사실 2년 전 드라마 ‘빈센조’를 보다 깜짝 놀랐다. 주인공 송중기를 돕는 조연 중 하나로 김설진이 등장해서다. 최고의 무용가인 그가 허름한 상가 댄스학원에서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좀 낯설었는데, 한 번의 외도도 아니었다. 곧바로 연극 ‘완벽한 타인’ 무대에서 게이가 됐고, 최근에는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소극장 2인극에 도전했다. 엄청 주목받을 만한 역할도 아닌데, 스타 춤꾼이 왜 연기를 할까. 그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주목받는 스타가 되려고 무대에 선 적은 없어요. 스타라는 건 ‘넘사벽’이죠. 송중기든 피나 바우쉬든, 스타가 된 사람은 뭔가 다른 인종 같아요. 저는 춤으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고, 사람 공부를 하려고 연기를 하게 됐어요. 영상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죠. 스마트폰 때문에 사람들이 영상에 빠져있는 걸 보면서, 옛날 LP판이 생겼을 때 음악가들은 어땠을까 싶었거든요. 그들이 LP음질을 좋게 만들려고 고민한 것처럼, 저도 춤을 영상에 멋지게 담을 고민을 하게 된 거죠. 그럴 때 운 좋게 드라마를 하게 됐어요.”

연기하느라 춤에 소홀한 것 아닐까 싶은데, 오히려 연기가 춤에 도움이 된단다. 연기도 춤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춤은 구체적이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슬프고 기쁘고 신나고 그리움을 표현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슬프고 기쁜지는 생략하곤 하죠. ‘밥 먹었냐?’라는 말 한마디도 관계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데, 춤은 상대가 바뀌어도 똑같이 내 것만 하는 느낌이랄까요. 연기를 하기 전엔 그저 동작 수행을 고민했다면, 지금은 동작 안에 더 많은 것들을 담으려고 고민하게 됐죠.”

그를 처음 만난 건 꼭 10년 전이다. 당시 피핑톰 소속으로 내한 공연을 온 ‘뉴페이스’였는데, 사진 촬영을 위해 춤동작을 주문하니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 같기도 하고 발바닥에 용수철을 단 것 같기도 한 경이로운 움직임을 지치지도 않고 구사해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엔 몸풀고 나면 벌써 힘들어요.(웃음) 20대 때는 아침 7시부터 밤 12까지, 하루에 7시간 빼고 계속 춤을 춰도 안 힘들었거든요. 며칠 전에 한 스트릿 행사에서 잠깐 저지쇼를 했는데, 옛날처럼 하지도 못했으면서 다음날 어디서 구른 것처럼 아프더군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오랫동안 춤출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춤추고 싶으니까요.”

당시만해도 ‘라이징’이었던 그는 많이 달라졌다. 2014년 ‘댄싱9’ 우승으로 관계자들만의 잔치였던 현대무용 공연장에 처음으로 대중을 불러들였고, 안무가로 우뚝 섰으며, 배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용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던 당시 생각은 변함이 없단다. 독보적인 안무가 그룹 ‘무버’를 이끌며 후배들과 창작 기회를 나누고 있는 이유다.

“무용계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후배들이 잘 나가려면 뭘 해줘야 될까, 제 고민만 더 커졌죠. ‘무버’는 다른 민간 무용단과 달라요. 한 명이 끌고 가는 단체는 그 사람이 사라지면 단체도 사라지잖아요. 저는 되도록 다른 멤버가 안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해요. 김기수 안무가의 ‘메리 고 라운드’는 최근 뉴욕에도 다녀오고, 4월 영국 투어도 잡혀 있어요. 제 작품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후배를 키우고 싶었죠. 그들이 커져야 지속될 수 있거든요. 끼 있는 무용가들도 많은데, 방송에 나갈 기회도 많아졌으면 해요. 스타가 많이 나오면 무용계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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