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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 우크라 피란민 "일 없는데 곧 출산… 막막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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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잔나 로마네코(33)는 지난해 10월 아들, 시부모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 왔다. 사진 본인제공

잔나 로마네코(33)는 지난해 10월 아들, 시부모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 왔다. 사진 본인제공

“두달 뒤엔 둘째가 태어나요. 앞으론 어떻게 살죠….”

1일 안산의 한 교회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국적 잔나 로마네코(33)의 눈가는 젖어있었다. 한국말이 서툰 그는 김종홍 선교사를 통해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향 땅에서 아이를 키우며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이제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피난민으로 살고 있다. 남편은 국가 총동원령 때문에 미사일이 쏟아지는 고국에 홀로 남았고, 뱃속에는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는 가족 걱정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룬 지 오래됐다고 했다.

잔나는 지난해 10월 고향을 떠났다.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족들이 언제까지 무사할지 알 수 없는 날들을 보내며 고통과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결국 8살 아들, 60대 시부모의 손을 잡고 루마니아 국경을 넘었다. 고려인인 남편 덕에 가까스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경기도 안산에 작은 집도 구했다. 단기방문비자(C3)로 입국해 일시체류비자(G1)를 받았지만, 한국 법무부의 조치로 제한적인 취업활동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가족들을 위해 이름도 낯선 땅을 헤매며 일자리를 구했다. 어디든,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심경으로 안산 반월공단 등을 오갔다. 하지만 한국어는 서툰 데다 언제 한국을 떠날지 모르는 외국인 여성을 써주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고향에 남은 남편도 원래 건축일을 했지만, 전쟁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 가족들은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잔나는 가족들 몰래 홀로 눈물짓는 날이 늘었다. 잔나는 이날 인터뷰 중에도 “남편이 있는 오데사는 미사일이 떨어지고 전기도 자주 끊긴다. 내가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일이 없다. 살길이 막막하다”며 울먹였다.

병 악화해 제대로 못 걷는 둘째… 일자리 없어 ‘막막’

아나스타시야 말리노브스카야(36·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지난해 8월 국경을 4번 넘어 한국에 왔다. 사진 본인 제공

아나스타시야 말리노브스카야(36·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지난해 8월 국경을 4번 넘어 한국에 왔다. 사진 본인 제공

우크라이나 헤르손에서 농사를 짓던 아나스타시야 말리노브스카야(36)의 삶도 지난해 3월 전쟁이 시작되며 급변했다. 강제 러시아화(化)를 견딜 수 없었던 아나스타시야 가족은 고심 끝에 지난해 8월 고향을 떠났다. 크림반도를 거쳐 러시아로 넘어간 뒤, 다시 발트 3국을 지나 폴란드로 향했다. 6일간 국경 여럿을 넘는 대탈출이었다. “무섭다며 우는 아이들을 달래가며 차에서 숙식을 해결할 만큼 강행군이었다”고 설명했다. 그 역시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 남편 덕분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지만, 타향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취업비자(H2)를 받은 남편이 단순 노무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피부근염을 앓고 있는 둘째의 상태가 나빠졌다. 잘 걷지도 서지도 못한다. 의료비 부담이 커지며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 했지만, 방문동거(F1) 비자를 받은 그에게는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난 1일 안산의 한 교회가 진행한 한국어 수업에 참석한 그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한국어를 배우는 것뿐”이라며 눈시울을 훔쳤다.

김 이리나(오른쪽)는 지난달 30일 어머니(가운데)를 잃었다. 사진 본인 제공

김 이리나(오른쪽)는 지난달 30일 어머니(가운데)를 잃었다. 사진 본인 제공

일 구하러 나갔다 세상 떠난 어머니… 빈소도 못차려

4달 전 한국으로 피난 온 우크라이나인 김이리나(35)는 지난달 30일 어머니를 잃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집을 나섰다가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은 되찾지 못했다.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돈이 없어 빈소를 마련하지 못했다. 어머니 시신은 병원 냉동고에 안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온 뒤 직업을 구하지 못했고, 수중의 돈도 바닥났다. 무국적 고려인이라 G1비자를 받았고, 구직활동도 어려웠다. 거듭된 좌절에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다. 한국과 우크라이나를 오가는 비행 노선이 끊긴 상황에서 여권이 없는 무국적 고려인이 비행기에 오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김이라나를 돕는 다른 고려인 여성은 “의료비나 주거비 부담이 극심하지만,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기도 어렵고, 한국에서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피난민의 사연이 알려지자 법무부는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에서 온 무국적 고려인의 G1비자를 여권 없이 갱신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우크라이나 국적의 장·단기 체류자는 5205명이며 이중 우리 동포가 3438명이다.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려인도 200~300명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국적을 잃고 회복 신청 기간을 놓친 이들의 후손이다. 법무부는 지난해 2월 전쟁 발발 뒤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3000여명이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피난민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려인을 돕고 있는 김영숙 ‘고려인 너머’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피난민 중 임시체류자격을 받은 이들은 현실적으로 취업이 어렵다. 건강보험료와 주거비 등 생계 곤란에 처한 피난민을 위해 정부에서 긴급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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