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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한도 하나 푸는데 날 잡는다…"택시로 은행 투어할 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강서구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미진(26)씨는 최근 계좌의 출금 한도를 풀기 위해 한 은행 영업점에 갔다가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간단한 업무라고 생각했는데, 대기 손님이 많아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를 듣고서다. 회사에 돌아가 봐야 하는 김씨는 초조해졌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주변 동네의 다른 지점을 찾았다. 그는 “두 번째로 간 곳에서도 40분을 기다렸다”며 “은행 갈 시간도 없는데, 영업시간은 짧아 작은 업무를 볼 때마다 ‘투어 ’하듯 지점을 돌아다녀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11일 서울 마포구 한 은행 영업점에서 고객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서지원 기자

11일 서울 마포구 한 은행 영업점에서 고객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서지원 기자

이른바 ‘이자 장사’로 역대 최대 수준의 수익을 올렸는데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은행권의 서비스에 대해 금융소비자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당장 치솟은 대출 금리로 서민의 허리가 휘는 것은 물론이고, 간단한 은행 업무 보기조차 어려워졌다는 비판이다. 대출 상담을 받는 것부터 환전을 하거나, 일회용 비밀번호(OTP) 생성기를 재발급하는 등의 단순 업무까지 직장인에겐 ‘날을 잡아’ 해야 하는 일이 돼가고 있다.

소비자는 가장 와 닿는 불편 중 하나로 짧아진 영업시간을 꼽는다. 은행권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2021년 7월부터 은행 영업시간을 기존 오전 9시~오후 4시에서 앞뒤로 30분씩 총 1시간을 줄여 오전 9시30분~오후 3시30분으로 줄였다. 직장인 윤홍식(31)씨는“대출 때문에 은행을 가려면 연차나 반차 휴가를 내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시간을 줄여 놓고 업무를 충분히 못 보는 고객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상암동의 은행 직원 A씨는 12일 “마감 뒤에 찾아오는 ‘지각 고객’이 매일 있다”며 “오늘도 줄이 길어 기다리던 고객 절반이 돌아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은행도 이런 소비자 불만을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시간의 원상복구 여부는 은행 노사 간의 추가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12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는 관련 협의를 위한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의견을 교환했지만, 여전한 입장 차를 보였다.

양측 모두 고객의 불편을 덜어줘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금융노조는 “실내 마스크 의무가 해제되면 영업시간 복구에 대해 재논의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사용자협의회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됐는데 왜 은행권만 그대로냐는 사회적 비판 분위기를 고려하면 빠르게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이르면 이달 안에 실내 마스크 ‘의무’를 ‘권고’로 조정할 가능성도 있어 양측의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은행권의 움직임이 더딘 데는 과거와 달라진 고객의 은행 이용행태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점을 직접 방문하는 고객은 줄고, 대신 모바일·디지털로 각종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은행 입장에선 지점 수를 줄이고, 온라인 고객의 이용 경험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지난달 우리금융경영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MZ세대(19~41세 대상 조사)의 99.8%가 최근 3개월 동안 모바일 뱅킹을 통해 금융 서비스를 이용했고, 지점을 직접 찾은 비중은 42.4%에 불과했다. 상암동에서 만난 40대 은행 고객 공모씨는 “은행에 가보면 기다리는 분은 대부분 어르신”이라며 “젊은 사람은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도 하고 대부분의 업무를 보는데, 어르신은 기다리다 포기하고 나가기도 한다”고 전했다.

일부 은행에선 점심시간에 문을 닫기로 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KB국민은행은 오는 30일부터 일부 소형 출장소에서 점심시간 영업 중단을 시행할 예정이다. 군부대 등에 들어가 직원이 2명인 소형 출장소 9곳뿐이지만, 국내 최대 은행의 새 방침이 은행권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출 금리는 올리고 예금 금리는 내리며 ‘이자 장사’로 번 돈을 서비스 개선보다 성과급과 퇴직금으로 쓴다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교보증권에 따르면 주요 금융지주(KB금융·신한지주·하나금융·우리금융)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전년보다 11.7%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주요 시중은행은 지난해 경영 실적의 성과로 기본급의 최고 400%에 이르는 성과급을 책정했고, 희망퇴직 때 최대 5억원 수준의 퇴직금을 주는 은행도 있다.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명퇴가 안타까운 구조조정이 아니라, 거의 퍼주기식 복지제도", “연봉은 높이고, 일하는 영업시간은 줄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은행만 이익을 보는 건 이기적이다”라는 반응이 줄을 잇는 중이다.

여당과 정부도 은행권 압박에 나섰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예금과 대출의 이자 차이가 커서 서민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금융당국은 금리 결정 과정에 위법·부당한 일은 없는지 철저히 감독해 주길 바라고, 시중은행은 합리적인 예대 이율을 설정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국회부의장인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은 은행의 예금·대출 금리 차로 인한 수익을 공시·보고하도록 하는 내용의 은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은 “은행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2021년 7월 이후 영업시간을 1시간 단축한 것도 모자라 이제 점심시간에도 문을 닫겠다고 한다”며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 일을 보던 국민 불편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 10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 노사 간 원만한 협의를 통해 영업시간이 하루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밝혔다. 앞서 5일에는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은행 영업시간도 정상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국민의 정서와 기대에 부합할 것”이라며 “서비스업으로서의 은행에 대한 인식 제고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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