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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싼 에너지' 시대에…한겨울 문 열고 난방, 반팔 차림 쇼핑 [신년기획 - 에너지 과소비 스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20일 프랑스 파리의 샤요 궁 앞. 오후 11시 45분이 되자 맞은편 에펠탑의 노란 조명이 꺼졌다. 황금색 등대처럼 파리시 전체를 밝혔던 에펠탑의 조명이 사라지자 주변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자정쯤엔 거리의 가로등조차 대부분 꺼졌다. 파리시는 에너지 소비를 10% 줄이기 위해 주요 기념물ㆍ공공건물의 조명 소등 시간을 1시간 이상 앞당겼다.

한국 관광객 박 모 씨는 "야경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 방의 난방 온도도 에너지 절약을 위해 낮게 설정돼 있었다"면서 “휴대용 전기 매트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문을 활짝 연 채 난방을 하고 있는 서울 명동 상점가의 한 가게. 명동에서만 이런 가게가 수십곳에 달했다. 정종훈 기자

지난달 27일 문을 활짝 연 채 난방을 하고 있는 서울 명동 상점가의 한 가게. 명동에서만 이런 가게가 수십곳에 달했다. 정종훈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6시 서울 명동. 영하 추위 속에서도 문을 열어둔 채로 난방기를 가동하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 화장품 가게 직원은 “손님이 드나들기 불편할까 봐 그냥 열어 놨다”고 했다. 난방 온도도 높아 3층 규모의 신발 가게는 입구를 활짝 열어놨는데도 내부는 땀이 날 정도였다. 직원들은 가벼운 티셔츠 차림이었다.

인근 도심의 한 백화점에선 외투를 벗어들고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반소매만 입은 행인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기자가 챙겨간 온도계가 가리키는 실내 온도는 24도를 넘었다. 백화점을 찾은 A씨는 “물품 보관함에 외투를 벗어두려는 사람이 많아 줄을 서 한참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도심의 한 백화점. 바깥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실내에선 반소매를 입고 매장을 둘러보는 고객이 적지 않았다. 임성빈 기자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도심의 한 백화점. 바깥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실내에선 반소매를 입고 매장을 둘러보는 고객이 적지 않았다. 임성빈 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석유·천연가스·석탄 등 주요 에너지원의 가격이 동시에 솟구치자 세계는 에너지 소비의 고삐를 바짝 죄고, 효율화 속도는 끌어올리고 있다. ‘빛의 도시’였던 파리는 불을 끄고, 스페인은 냉난방 시설이 설치된 건물의 자동문 닫힘 장치 설치를 의무화했고, 일본은 다시 원자력발전을 확대하기로 했다. 에너지를 아껴 쓰고, 효율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저렴하고 깨끗한 새 에너지원(源)이라는 인식에서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에 뒤처져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동시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3%에 이르는 국가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1달러를 생산하기 위해 0.39㎾h의 전력을 소비한다(2019년 기준). 미국(0.237㎾h)의 1.6배, 일본(0.16㎾h)의 2.4배, 덴마크(0.076㎾h)의 5.1배 수준이다. 같은 양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전력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비효율적인 소비를 한다는 의미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의 한 백화점 안에서 온도계가 24.8도를 나타내고 있다. 임성빈 기자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의 한 백화점 안에서 온도계가 24.8도를 나타내고 있다. 임성빈 기자

이는 무엇보다 가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다. 기본적으로 전기요금이 낮은 편인 데다, 최근엔 고물가를 우려한 정부가 요금 인상 폭을 제한하면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지낸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껏 에너지 효율화에 대한 투자가 잘 안 된 이유는 요금이 너무 낮아 그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전력수요는 2000년 239TWh에서 2019년 520TWh로 117.3% 증가했다. 같은 20년 동안 일본은 5.9% 감소했고 독일과 미국은 각각 7%·7.9% 늘어난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이후 벌어진 에너지 위기 국면에서도 한국은 주요국과 다른 흐름을 보였다. EU 24개 회원국의 1~10월 전력 수요는 전년 동기보다 10.8% 감소했는데, 한국은 되레 4%(1~8월 기준) 증가했다. 그 결과 지난해 원유·가스·석탄 3대 에너지원 수입액은 전년 대비 784억 달러 늘며 1908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 여파에 지난해 무역적자도 472억 달러를 넘어섰다. 에너지 빈국에서 벌어지는 ‘싼 전기요금→비효율적 소비→에너지 수입 증가→무역적자 심화’라는 악순환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세계 주요국의 해법은 소비 감축과 에너지 효율 증대다. 유럽연합(EU)은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를 담은 ‘핏 포 55(Fit for 55)’를 통해 2024~2030년 매년 1.5%씩 에너지 사용을 줄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오는 2025년부터 건물 에너지 효율 향상 의무화법을 시행할 계획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도 에너지 효율 향상이 주요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이런 흐름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40년까지 전 세계가 에너지 효율에 투자하는 비용이 약 14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설비투자 예상 규모(13조 달러)보다 크다. 각국이 차세대 에너지원 개발만큼 에너지 효율화를 시급한 과제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다.

오후 11시45분 이후 화려한 조명이 모두 꺼진 에펠탑. 에너지 위기로 평소보다 75분 일찍 소등한다. 파리=정종훈 기자

오후 11시45분 이후 화려한 조명이 모두 꺼진 에펠탑. 에너지 위기로 평소보다 75분 일찍 소등한다. 파리=정종훈 기자

하지만 에너지 효율화에 속도를 내는 주요국에 비해 한국의 대응은 느리다. 당장 요금 문제부터 그렇다. 천문학적 적자에 한국전력이 빚더미에 오르자 정부는 올해 1분기 전기요금을 2차 오일쇼크 이후 최대 폭인 ㎾h당 13.1원(전 분기 대비 9.5%)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한전의 빚 해결은 물론 그간 누적된 과소비·비효율을 개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손양훈 교수는 “해외 상황에 특히 쉽게 흔들리는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에너지 가격을 적정한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효율적으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전력 판매 경쟁, 지역별 요금 차별 적용 등을 포함한 다양한 효율화 방안을 검토해 적절한 장소·시간으로 전력 수요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에너지 공급자에게 에너지 판매량과 비례해 에너지 절감 목표를 부여하고, 효율 향상을 위한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에너지 효율 향상 의무화제도’(EERS)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단순한 소비 절약을 캠페인을 넘어 제도로 이를 뒷받침하자는 취지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액화천연가스(LNG)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게 2026년이라 2025년까지는 ‘비싼 에너지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며 “에너지 효율이 낮은 중소기업의 기기와 시스템을 저전력형으로 교체하게끔 지원하고, EERS 제도를 확대해서 소비 절약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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