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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창완을 울린 그림 동화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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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호 16면

동화책 낸 동양화가 허달재

백매화를 그리고 있는 직헌(直軒·바름 마음가짐) 허달재 화백의 모습. 장정필 객원기자

백매화를 그리고 있는 직헌(直軒·바름 마음가짐) 허달재 화백의 모습. 장정필 객원기자

동양화가 허달재(71) 화백이 최근 동화책 『나는 누굴까?』(엔씨소프트)를 출간했다. 70평생에 처음 쓰고 그린 동화책이다. 책갈피를 열어보니 역시 남다르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장삼을 입은 듯 보이는 아이들은 어느 한구석 모난 데가 없다. 빨강·노랑·초록 등등 화선지를 곱게 물들인 색들 역시 온화하다. 무엇보다 허 화백 필법의 특징인 흰색·금색 점이 페이지를 가득 채운 풍경이 눈 오는 날의 풍경인 듯, 달빛 아래 풍경인 듯 은은하고 따뜻하다. 책 크기도 넉넉해서 슬며시 한 장 찢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싶다.

‘나는 누굴까?’라는 질문은 어른들에게도 어려운 철학적 질문이다. 하지만 허 화백은 담담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너와 나, 우리는 모습이 모두 달라” “마음도 모두 다른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 “나의 모습은 어떨까? 해님 같을까? 달님 같을까?”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표지. 장정필 객원기자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표지. 장정필 객원기자

가수 김창완씨는 “나는 울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왜 이렇게 간단한 질문을 오래도록 짊어지고 왔을까?”라는 리뷰를 남겼다. 어른을 울려버린 책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을까. 지난 28일 광주에 있는 허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가수 김창완 “너무 아름다워 울었다”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삽화. 장정필 객원기자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삽화. 장정필 객원기자

그림 속 아이들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리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기존 동화책 그림들을 보니 다 비슷하더라. ‘나’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유일한’ 나인데. 눈·코·입이 없어도 그림 속 풍경을 보면 지금 이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지금 내 표정은 어떤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머리모양이나 옷으로 구분하는 남녀도 나누기 싫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돌을 사람형상으로 그린 ‘돌아이’를 생각했는데 그려보니 너무 무겁더라.”
동화책을 출간한 계기는.
“엔씨소프트가 직영으로 운영하는 직장어린이집 ‘웃는땅콩’의 구자영 원장과 인연이 있어 만날 때마다 요즘 아이들 키우기를 조언했더니 아예 동화책을 내자고 하더라.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오래 미뤄왔는데, 생각해보니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듣고 자란 옛날이야기가 많더라.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고민하다 ‘나는 누굴까?’ 질문부터 시작했다.”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삽화. 장정필 객원기자

동화책 『나는 누굴까?』의 삽화. 장정필 객원기자

‘나’를 안다는 것의 궁극적 목표는.
“나의 천품(天稟)을 아는 게 중요하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게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누구나 하늘이 준 천품이 있다. 목소리·얼굴·지문, 보이지않는 정신세계까지 우린 모두 다르게 태어났다. 누구는 문인의 기질, 누구는 무인의 기질로 태어나니 그 기질에 맞게 살아야 한다. 문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무인으로 살려면 힘들다. 내 길이 이쪽인 줄 알면서도 욕심내서 나를 속이고 다른 길을 가면 나도 힘들고 남도 불편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부터 잘못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자식의 천품에 맞지 않는 학원에 보내 아이들을 불행하게 한다. 인간의 근본이 깨지면 사회의 균형이 깨진다.”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질문 아닌가.
“아이들도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조건 흥이 나야 좋은 거라고 생각해 맨날 뛰고 웃기만 하는데 그건 우리 사회가 몸 위주의 사회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몸이 건강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람에게는 정신도 있다. 이 둘이 잘 어울려 하나의 사람이 되듯, 정신을 건강하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 애들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다. 그걸 생각할 시간과 습관을 길러줘야 한다. 사실 동화책 속 아이들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허달재 화백은 의재 허백련(許百鍊·1896~1977)의 손자이자 제자다. 의재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許鍊·1808~1893)과 그의 손자인 남농 허건(許楗·1907~1987)을 잇는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다. 의재의 장손인 허달재 화백 역시 남종화의 맥을 잇고 있다.

백매화를 그리고 있는 직헌(直軒·바름 마음가짐) 허달재 화백의 모습. 장정필 객원기자

백매화를 그리고 있는 직헌(直軒·바름 마음가짐) 허달재 화백의 모습. 장정필 객원기자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허백련에게서 서예와 사군자를 배웠던 허달재 화백은 “어려서는 붓글씨도 그림도 싫어서 매일 들로 산으로 도망 다녔다”고 했다. “실컷 뛰어다니다 문득 나무 밑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새들은 어디로 갈까?’, 개울 밑을 바라보며 ‘물은 어디로 갈까?’ 생각에 잠겼던 때가 많았다. 그 경험을 동화책에 담았다.”

홍익대 동양화과 졸업 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여온 그는 뉴욕주립대와 뉴욕스토니브룩대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뉴욕·파리·도쿄·베이징 등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남종화의 맥을 잇는 한편, 동양화의 전통을 현대적 기법으로 재해석하는 독특한 화풍으로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있다. 지난해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아트페어에서 대형 매화 그림 3점을 완판하며 화제가 됐고, 지난 5월 문화재청이 청와대를 처음 공개했을 때는 대통령 집무실에 가로·세로 285?207㎝대형 사이즈의 그의 그림 ‘백매(白梅)’가 소장돼있어 또 한 번 주목받았다.

남종화의 특징은.
“동양화의 2대 조류다. 북종화는 채색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을, 남종화는 수묵담채 위주의 사의적인 그림을 그린다. 산을 봐도 작가의 경험과 삶에 따라 느끼는 게 다 다르니까 가을 산의 스산한 느낌, 여름 산의 무거운 맛을 그린다. 또 다른 차이점은, 북종화는 서양화처럼 본(밑그림)을 먼저 뜬 후 채색을 한다. 반면 남종화는 상대가 주는 기운에 따라 그리기 때문에 본을 뜨다보면 그것을 놓친다. 그래서 필선을 수없이 연마해서 순간에 그려야한다.”
매화 그림의 대가로 유명하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춘설헌’ 앞에 매화나무가 많았다. 그걸 매일 보고 자랐으니 제일 익숙한 풍경이다. 삶의 태도나 그림을 그리는 정신은 할아버지를 따르고 있지만, ‘누구의 손자’로만 남을 수 없으니 나만의 매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화선지에 홍찻물·치잣물·먹물을 들여 바탕색을 깔기도 하고. 먹만으로는 매화의 화려한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채색도 하고. 금분(金粉)을 사용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매화 꽃술까지 세밀하게 그렸지만, 이젠 하나의 점으로만 매화를 표현한다. 가지를 먼저 그리고 점을 세 번 찍는다. 백색·홍색 점으로 매화를 그리고, 그 위에 금분으로 점을 찍고, 마무리로 ‘꽃턱’을 찍는다. 꽃턱이 푸르면 청매, 갈색이면 백매다. 남종화는 붓글씨를 쓰듯 ‘쓰는 그림’이라 마음속 붓 가는 대로 필력에 따라 작가의 맘보가 드러나고, 그게 상대편에게 전달된다. 다만 ‘소소밀밀’, 소소하기만 해도 밀밀하기만 해도 안 된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습관 길러줘야

동화책부터 매화까지, 볼수록 참 편안하다.
“정중동(靜中動·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채근담)의 힘이다. 예부터 그림에 ‘힘이 있다’고 하면 동 속에 정이 함께 들어있는 그림을 말한다. 동만 있으면 거칠고, 정만 있으면 약하다. 사람의 품격도 이와 같다. 몸(동)과 정신세계(정)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는 보이는 세계 위주로만 살다보니 정중동이 없는, 품격 없는 삶을 살고있다.”
『나는 누굴까?』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동화다.
“정치를 하든, 경영을 하든 자신의 천품을 알고 그 길을 가며 ‘정중동’을 지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알게 된다.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 세 번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를 수시로 돌이켜보며,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남의 입장을 살펴야 남을 불편하게 하지않는다. 현실 정치를 봐도 지금처럼 서로의 입장만 주장하면 악순환뿐이다. 옛날 자유당 시절에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다. 보수·진보 가치기준이 다르니 입장도 다르겠지만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야한다. 정치도, 삶도 품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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