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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석의 살아내다

"누가 오나요?"는 오해...무연고 사망 장례식, 붐비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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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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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고인의 이름 앞에 ‘무연고 사망자’라는 수식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그의 삶이 외롭고 쓸쓸했다고 오해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수식이 내포하는 뜻이 ‘아무런 연고가 없음’이니까. 이 단어는 매우 직관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고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그를 대표하게 된다. 개인의 역사를 지우고, 혼자로 만들어버린다.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통해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렇게 고인들을 오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해는 질문을 부른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봤자 누가 오는데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무연고 사망자’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연고 사망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의된다.

1. 연고자가 없거나,

2. 연고자를 알 수 없거나,

3.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다.

앞선 두 가지, 즉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사법)에 명시되어 있는 법조문이고,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는 보건복지부 지침에 명시되어 있는 정의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보건복지부 지침인 세 번째 경우에 의아함을 느낀다. ‘무연고 사망자인데 가족이 있다고?’ 그렇다. 가족이 있어도 ‘무연고 사망자’가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경우가 전체 무연고 사망의 7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세상에 혼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연결된 채였고, 설령 그 연결이 끊어지더라도 필연적으로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연고 사망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혈연이 있었고, 살아가면서 맺은 혈연 외의 인연도 있었다. 무연고라는 꼬리표와 달리 연고가 있는 셈이다.

폴란드 작가 유제프 리슈키에비치의 'Death of Vivandiere'.

폴란드 작가 유제프 리슈키에비치의 'Death of Vivandiere'.

무연고 사망자 빈소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시신을 위임한 가족도 많다. 장례식이 끝나고 빈소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직접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다. 재작년에 만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제 나이가 벌써 칠십입니다. 은퇴한 지도 꽤 됐고 지금은 생활이 어려워서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있어요. 동생이 죽었다고 했을 때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당장 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위임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 노릇을 못 했다며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무연고 사망자 대부분은 빈곤하고,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2015년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평균 장례 비용은 1380만 원에 달한다. 웬만한 형편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물론 조의금으로 장례비용을 메우기도 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빈소 사용료나 음식 등 여러 가지를 생략해 최대한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줄여도 장례는 최소 백만 원 단위의 목돈이 들어간다. 결국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처리위임서에 가장 많이 적히는 위임 사유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빈부 격차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따라붙는 셈이다.

가족처럼 살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도 장례에 참여한다. 장사법이 이야기하는 가족의 범위는 매우 협소해서 사촌지간은 서로의 장례를 바로 치를 수 없다. 사위나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상식선의 가족도 이러한데, 혈연을 벗어난 이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연고 사망자의 사실혼 배우자와 친구 등이 돈과 의사가 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보건복지부가 지침을 바꾼 덕분에 이들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생겼지만,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까운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고인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기꺼이 그를 애도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의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는 일종의 시민장이다. 애도하길 원하는 이들은 누구나 빈소에 조문올 수 있다. 바쁜 삶을 사는 와중에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시민을 볼 때마다 뭉클함을 느낀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죽음 이후에도 단단한 결속을 지닌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설령 당신이 혼자 세상을 떠나더라도 시민이 곁에 함께 할 것이라는 인기척인 셈이다.

이들의 존재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이유가 된다. 실제로 서울시립승화원에 마련된 공영장례 빈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사별자와 시민들이 고인의 위패 앞에서 눈물짓고 애도한다. 그때마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봤자 누가 오는데요?”라는 처음의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뒤늦게나마 속으로 대답한다. ‘무척 많아요. 무연고 사망자는 외딴 무인도에 살던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시민인걸요.’

사별자들에게 애도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많은 시민이 고인의 곁을 지킨다면 무연고 사망자라는 개념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보아왔던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게 가르쳐 준 믿음이다.

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