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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은혜의 살아내다

"선생님, 아빠 마지막 생파 오세요" 평생 못잊을 이 가족 이별

중앙일보

입력

김은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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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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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진료하면서 가장 마음이 힘든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걸어서 퇴원하셨던 분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요. ”

이 환자도 그랬다. 그는 아내가 끄는 휠체어를 탄 채 병원에 들어왔다. 암 진단 초기부터 함께해와 몇 년간 지켜봤는데 본인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한쪽 손을 부여잡으며 앉아있는 모습이 몇 달 전 손을 흔들며 병원 밖을 걸어나가던 모습과 겹쳐졌다. 언젠가 올 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유독 더 충격이 컸던 건 두 부부가 이제 겨우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아내 뒤를 보니, 어린 세 소녀가 있었다. 환자로부터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부부의 세 딸이었다. 수년 간 부부와 연을 이어오다 보니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 글짓기 대회 입상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처음으로 만든 카네이션까지 직접 봤던 터라 처음 봤는데도 참 반가웠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반가움은 금세 슬픔이 됐다.

아빠 병세를 아는지 모르는지 막내는 병원 냄새가 무섭다며 훌쩍거렸고, 둘째는 병원 지하에서 뽑아 온 헬륨 풍선을 손에 꼭 쥔 채 “여기 왜 온 거야?”라고 엄마에게 계속 물었다. 그나마 첫째가 “엄마! 아빠 휠체어 내가 밀까?”라며 엄마 손 위에 본인의 작은 손을 포개고 있었다. 문득 환자가 손 흔들며 퇴원하던 날 둘째의 운동회에 참석하러 간다던 말이 떠올라 “운동회는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물었다. 그제야 얼굴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 환자는 해사하게 웃으며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그 웃음을 보자 ‘맞아. 원랜 이 분은 원래 이렇게 웃던 분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마지막으로 항암 치료를 받긴 하는데 대학병원 교수님이 큰 기대 하지 말고 주변을 정리하라고 해서 연명 치료 중단 동의서도 쓰고 왔어요.”

말기란 더 이상 시도해 볼 수 있는 표준치료가 없어 보통 6개월에서 1년 남짓 남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보통 체력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항암 치료를 허약해진 몸으로 버텨내는 건 무리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 자주 나타나서 한 달에 한 번 맞아야 하는 항암제가 며칠씩 지연되었다. 들어가는 주사가 하나둘씩 늘고, 진통제 양이 점점 많아지는 중에도 환자는 스스로 주변을 정리해야만 했고 아내는 또 그런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그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부부는 병실을 찾을 때마다 항상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밖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낮에는 세 딸의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고, 밤에는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르웨이 작가 아돌프 티데만의 'A Boy Bring Home a Sick Lamb'.

노르웨이 작가 아돌프 티데만의 'A Boy Bring Home a Sick Lamb'.

그렇게 석 달을 아내는 매일같이 남편의 옆을 지키며 몸을 닦아주었다.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도 아내는 의연하게 버텼다. 큰 기대 없이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몸을 본인 의지대로 움직여질 수도 없게 됐지만 환자 또한 의연하게 버텨냈다.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우연히 아내가 딸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 후 그 궁금증이 풀렸다. “설령 아빠가 우리를 먼저 떠난다 해도 그게 우리를 버렸다거나 포기했다는 건 절대 아니야. 너희가 보듯이 아빠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 식구 5명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오래 지키려고 버티고 있어. 그러니 우리도 아빠가 같이 있는 시간 동안 힘이 되어 주자. ”

언젠가부터 막내도 둘째도 누워만 있는 아빠 앞에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때때로 "아빠, 힘내"라고 말하며 손에 뽀뽀를 쪽 하고 부끄러운 듯 도망가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의젓했던 첫째는 엄마가 아빠 몸을 닦을 때면 물을 떠 날랐고 엄마가 쉴 때는 다리를 통통 두드려 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너무나 의젓해진 딸들이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자는 환자를 깨워 이런저런 상태를 확인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평소 가운 입은 나를 무서워하던 막내가 같이 따라 나왔다. “선생님 힘드셔. 괴롭히지 마!”라고 엄마가 딸을 말렸지만 나는 막내 손을 잡고 나와 스테이션에 같이 앉았다. 몇 분 뒤 첫째도 나왔다. 뭔가 말하려다 쭈뼛하게 입을 못 여는 막내를 병실로 돌려보내고는 첫째가 그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작은 아이들이 나를 붙잡는 걸까. 지금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기에 괜히 긴장되었다. 첫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주말에 막냇동생 생일 파티하는데… 와 주실 수 있어요? ”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당직이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이 아빠랑 같이하는 마지막 생일 파티가 될 거 같아서요. 막내가 선생님 좋아하니깐….”

생일파티는 생각보다 성대했다. 지방에 사는 환자 어머니는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배불리 먹자며 한 보따리를 챙겨왔다. 막내는 유명 할리우드 영화 캐릭터의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 재롱에 온 식구가 활짝 웃었다. 특히 누구보다 환자가 딸의 기운을 듬뿍 받았다. 그는 몇 번이고 "오늘은 오래 앉아 있어도 안 아프다""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하니 참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북받쳐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의 해사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감동스러운 한편 먹먹하기도 했다. 그날 오후 그 환자는 체력 문제로 며칠간 지연되고 있던 항암 치료를 다시 받았다.

딸과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함께 보내고, 마지막 항암 치료를 받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덤덤하게 남편을 잘 보내주었다. 본인이 꿋꿋이 거둬야 하는 세 딸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견뎌냈으리라 생각한다. 장례식장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이후로 그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이 가족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딸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도록 끝까지 버텼던 환자, 그 옆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본인 마음을 혼자 추스르던 아내, 그리고 엄마 아빠의 노력에 잘 따라온 딸들. 어찌 보면 평범한 장면이지만 내겐 그 어떤 장엄한 영화보다 감동적으로 각인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가족이 와해가 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기에, 이렇게 온 가족이 합심하여 이별을 천천히 준비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남겨진 아내와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만큼, 그 환자가 하늘에서만큼은 편히 쉬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우리 모두 서로 웃으면서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