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의 중국 뒤통수 때리기 배짱은 어떻게 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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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국공내전 [사진 바이두]

제2차 국공내전 [사진 바이두]

북한의 중국 뒤통수 때리기는 이골이 난 상태다. 한데 그 배짱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원은 1946년부터 시작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중국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됐는데 1946년 4월 제1차 창춘 전투에서 공산당은 국민당에 쫓겨 하얼빈까지 도망갔다.

그때 조지 마셜이 미국 특사로 중국을 맡고 있었다. 그는‘국공 연립정부를 세우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새기고 있었다. 이를 소위 ‘마셜 임무’라 부른다. 그런 그가 국공내전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셜은 1946년 5월 국민당과 공산당에 휴전을 제의했고 우세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는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국민당에 대한 원조뿐 아니라 병역의 만주 수송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여기서 잠시 마셜 특사의 얘기를 하고 다시 국공내전으로 돌아가자. 마셜 특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전쟁 영웅들의 멘토이자 천재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다. 마셜 특사는 1945년 12월 20일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국민당과 공산당 대표를 만나려고 했다.

마셜은 그들을 만나기 전에 웨드마이어 장군을 만났다.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있었다. 그는 마셜에게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웨드마이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첫째, 그들은 절대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둘째, 각자 더 많은 권력을 원하기 때문에 국공 합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셜은 웨드마이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는 제 사명을 반드시 완수할 터이니 도와달라”고만 했다. 그렇게 쓸모없는 토론으로 2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양측은 토론 시간을 전쟁 준비로 이용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1946년 5월 난징에 있는 마셜의 숙소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마셜은 아이젠하워에게 “난 이곳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일이라도 할 걸세. 난 심지어 육군에 입대할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66세 노병의 하소연이었다. ‘마셜 임무’는 결국 실패했고 그는 1947년 1월 귀국했다. 그리고 제임스 번스를 대신해 국무장관이 됐다.

다시 국공내전으로 돌아오자. 마셜이 제의한 휴전 기간에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을 역임하고 1946년 6월 동북국 부서기에 임명한 천윈을 특사로 급히 평양에 보냈다. 평양에 도착한 천윈은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의 집에서 머물렀다.

김일성을 만난 천윈은 마오쩌둥의 간절한 부탁이라며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상하이에 있는 공산당군을 배에 태워 북한에 상륙시킨 뒤 이후 하얼빈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동북 지방 대도시를 점령해 병력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당군에 고전하고 있는데 무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천윈은 “이번에 도와주면 중국 인민들은 이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김일성은 천윈이 중국으로 돌아간 뒤 간부들을 불렀다. 그리고 10만 명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무상으로 주자고 말했다. 북한도 정규 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중국공산당에 줄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있는 대로 다 줍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부 간부는 1만정쯤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냈지만, 김일성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북한은 김일성의 결정에 대해 “중국 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전체 조선 인민의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가 된다”고 선전했다. 국제주의적 의무는 동북 지방에서 항일을 위해 공동으로 싸운 의리에서 시작해 제2차 국공내전을 반드시 돕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금 이해되지 않기는 하지만, 아무튼 북한은 그렇게 주장한다.

김정일은 이 장면을 간부들에게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무기 한 자루가 우리에게도 아쉬울 때 10만여 정의 무기와 탄약, 폭약, 군복, 의약품을 동북민주연군에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언급한 이유는 북한 사람들이 중국과 협상할 때 자주 인용하라는 뜻이다. 중국공산당이 가장 어려울 때 무기를 지원한 것이 북한이라는 것을 말이다. 동북민주연군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동북지역 군대이며 사령관은 ‘전쟁의 신’으로 불리던 린뱌오였다.

문제는 그 많은 무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였다. 운반과정에서 국민당군이나 토비(土匪, 지방 도적 떼)에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북한에 와서 가져가라고 하자”와 “북한이 북‧중 국경까지 실어다 주자”가 맞섰다. 결정은 김일성이 했고 중국공산당이 요구하는 장소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다.

김일성은 지금의 호위 사령관에 해당하는 강상호 경위연대장에게 그 일을 맡겼다. 강상호는 『중국 동북해방전쟁 참가자들의 회상기』에서 “무기 수송의 비밀 때문에 자신을 경호하던 나를 임명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무기 수송은 화물 수송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국민당군이나 토비의 습격이 있을 수 있고 화재사고 등도 예견됐다. 강상호는 “중간에 토비들이 달려들어 무기 100정쯤 달라고 위협해 그들과 총싸움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강상호는 그런 과정을 거쳐 1946년 8월 중국 옌볜역에 도착했다. 옌볜역에는 당시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러 먼저 중국에 가 머무르고 있던 강건과 동북민주연군 부총사령관 저우바오중이 마중 나왔다. 강건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었고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 상관이었다.

무기를 받은 중국공산당은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북한이 발간한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에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무기가 없어 창이나 곤봉을 총대신 메고 다니던 많은 중국 전사들이 총을 받아 안고 환성을 질렀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감격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강상호는 『중국 동북해방전쟁 참가자들의 회상기』에서 북한의 지원을 두고 ‘피로써 맺어진 조중친선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지원으로 공산당이 국민당을 무찌르고 하이난다오(海南島)까지 내려가 중국을 통일하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했다고 자랑했다.

북한의 배짱(?)에 보탤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마오쩌둥의 말이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던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에는 조선 동지들이 흘린 피가 스며있다”고 언급했다. 김정일이 이 말 또한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0만여 정의 무기 지원과 똑같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제2차 국공내전 기간에 참여한 북한 사람은 무려 2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며 더더욱 전투 병력이 그렇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 동북해방전쟁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보면 포병 부대의 조수, 탱크‧자동차 운전사 등으로 참전했다는 얘기가 많은 데 대부분 지원 인력으로 추정된다.

제2차 국공내전 시기 북한군의 ‘파병’은 그동안 논란이 많았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파병’을 오해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북한으로 퇴각한 중국공산당 내 조선족 대원들이나 혹은 중공군을 북한이 포병‧공병 부대로 재조직해 무장시켜 중국으로 보냈다는 것에 입을 모으고 있다. 김일성이 일부 군사정치 간부나 일선 부대 간부를 보낸 것은 맞다. 대표적으로 강건, 최광, 오죽순, 지병학, 박낙권 등이다. 박낙권은 제1차 창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동북민주연군 길동분구사령부 제1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이 이렇게 군 관계자를 보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북한 군인들에게 현대전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실전을 통해 정치군사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은 민족군대의 골간을 육성하는데 큰 의의를 가진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이 한국전쟁의 북한군 주축이 된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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