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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과 사직 1년반만...흉부외과 전공의 "운명" 외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3월 이혜주 서울대병원 전공의가 종격동 종양 수술 후 상처를 봉합하고 있다. 사진 이혜주

지난해 3월 이혜주 서울대병원 전공의가 종격동 종양 수술 후 상처를 봉합하고 있다. 사진 이혜주

“사실 흉부외과를 박차고 나올 때만 해도 그냥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돈을 많이 벌고 여유롭기는 해도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서울대병원 흉부외과에서 전공의 3년 차로 일하던 이혜주(31)씨는 지난해 9월 돌연 사직서를 냈다. 쉴 틈 없는 업무로 번아웃이 왔다. 365일 ‘온 콜(on-call, 긴급대기)’ 상태로 휴가도 없이 사는 선배 의사들을 보며 미래를 위해 사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병원 문을 나선지 1년 3개월, 이씨는 다시 흉부외과로 돌아간다. 그가 다시 용기를 내게 된 이유는 뭘까.

“실습 때 10~12시간 수술방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몰라”

지난 1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씨는 “흉부외과 일이 재밌기 때문”이라고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놨다. 막연히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의사가 됐다는 이씨는 실습을 돌면서 흉부외과 일에 매료됐다.

“드라마를 보면 보통 집도의가 ‘메스’라고 외치면서 손을 내밀잖아요. 그런데 여기선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어요. 눈빛으로 척척 이뤄지는 거죠. 수술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온 신경을 환자에게 집중하고 마치 한 몸처럼 손발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실습 때 하루에 10~12시간을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수술을 지켜보면서도 너무 재밌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결국 가족의 반대에도 이씨는 흉부외과로 전공을 택했다.

“흉부외과 교수들, 365일 온-콜 상태”

이혜주 전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전공의. [이씨 제공]

이혜주 전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전공의. [이씨 제공]

그렇게 시작된 이씨의 전공의 생활은 쫓김의 연속이었다. 이씨에 따르면 통상 일과는 오전 7시,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며 시작됐다. 맡은 환자만 30여명. 밤 사이 상태 변화가 있는지 30분 정도 체크하다 보면 수술방에 내려갈 시간이 된다. 수술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지만, 전공의 1~2년 차들은 미리 내려가 환자가 마취되는 과정을 체크하며 자세를 잡는 등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가슴을 여는 단계까지 도움을 주고 나오면 어느덧 시간은 오전 10시 반을 가리킨다. 이때쯤엔 곧장 교수들과 회진을 돌아야 한다. 한 차례 회진을 돌고 낮 12~1시쯤이 되면 수술이 마무리될 시간이다. 슬슬 다시 수술방으로 내려가 마무리 과정을 돕는다. 이런 과정을 온종일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끝나 있다. 여기에 새로 들어온 환자를 관리하거나, 일정한 주기로 병원에서 밤을 새며 야간 당직을 서는 것도 전공의들의 몫이다.

“그나마 전공의들은 법에 따라 주 80시간 근무 제한이 있어서 쉴 틈이 있어요. 반면 교수님들은 365일 언제라도 환자가 이상이 생겼을 때 달려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세요. 아무리 새벽 시간이라도 제 콜을 안 받은 적이 없으시고, 일부 파트 교수님들은 병원에서 2~3시간 떨어진 곳으로 휴가를 가지도 못해요. 응급 상황에 대비해 서로 일정을 조율하고 간신히 떠나시곤 하죠.”

이씨는 ‘내가 나중에 교수님들처럼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답답하고 막연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서울대병원을 나온 이씨는 피부 클리닉에서 잠시 일했다. 그러나 소위 ‘현타(현실자각타임)’를 느낀 이씨는 코로나19 거점 병원으로 이직해 6개월 정도를 일하다가 현재는 선배의 병원에서 진료를 돕고있다.

이씨는 “평생 할 자신이 없으면 박차고 나가야겠다 싶어 나왔지만, 다른 일을 하며 내내 아쉬움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와서 미용 클리닉 같은 걸 해도 사실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진 않았다”라고 했다. 이씨는 “흉부외과 일이 힘들긴 했지만, 재미도 있고, 가치도 있고, 시간도 빨리 갔는데 다른 데서는 돈을 많이 벌고 여유롭긴 해도 시간이 느리게 가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업무강도가 덜하고, 보상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길 대신 고된 필수의료의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운명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용기를 냈지만 한편으론 ‘한 번 중도 포기했던 전공의’라고 낙인찍히는 게 두렵기도 하다는 이씨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한 번 나가봤기 때문에 다시 번아웃이 온다고 해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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