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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같이 살기 위해선 다양성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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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양형진 고려대 반도체물리학 교수

양형진 고려대 반도체물리학 교수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하는 시기가 다시 왔다. AI 바이러스는 사람에게도 감염될 수 있고,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의 원인으로도 추정된다. 주로 철새·닭·오리 등 조류에 감염되므로 조류독감이라고도 한다. 전파 속도가 아주 빠르므로, 고병원성 AI는 가축전염병예방법에서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분류된다.

AI가 발견되면 인근 지역의 가금류를 도살하고 알과 고기를 폐기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땅에 파묻는 일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을 터인데,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일이 됐다. 적지 않은 경제적 희생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면서 그렇게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근원적인 이유는 철새가 아니다. 우리가 기르는 가금류가 AI 바이러스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역사에서 보면 동물과 바이러스는 언제나 함께 살아왔다. 자연 상태의 야생 철새는 아주 오래전부터 조류독감을 앓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생 철새는 유전적으로 다양하므로, 조류독감에 취약한 일부가 죽더라도 나머지는 회복한다. 일부는 아예 앓지 않을 수도 있다. 상당한 수가 조류독감으로 죽더라도 살아남은 철새는 적응하면서, 조류독감과 공존하게 된다.

다양성 확보는 생명종 유지 전략
우린 다양성 버리고 효율성 선택
각종 꽃 만발한 ‘화엄’ 세계처럼
서로 다름이 어우러질 수 있어야

조류독감과 공존하는 야생 철새의 생명력은 유전적 다양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키우는 닭이나 오리엔 이 다양성이 없다. 고기와 알을 얻으려고 품종 개량을 하면서, 닭의 유전적 구성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같게 됐다고 한다. 이런 닭에 AI가 침투하면 모든 닭이 조류독감에 걸린다. 획일화된 유전자는 고기와 알을 많이 얻기에는 적합하지만, 건강할 수 없다.

어떤 환경에서 잘 적응해 번성하더라도 환경이 바뀌면 전혀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 공룡이 대표적인 예다. 공룡은 중생대 쥐라기에 출현하여 백악기에 크게 번성했지만, 백악기 말에 있었던 전 지구적인 대멸종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다. 포유류는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그 후 번성하여 포유류의 시대를 열었다.

공룡이 멸종한 것은 덩치가 작았던 그 당시의 포유류와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다.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 종보다 강해서 어느 한 시대를 지배하더라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 세계에서는 가장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한 생명체가 살아남는다.

환경이 변해도 멸종하지는 않아야 하므로 생명 세계는 환경의 변화에 대비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양성의 확보가 중요하다. 다양한 개체가 있다면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는 개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번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다양성은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남아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는 최선의 방책이다.

단세포생물은 세포 분열로 증식한다. 세포 분열을 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복사하여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어낸다. 열 번만 분열하면 한 개체가 1024개로 불어난다. 아주 효율적이지만 다양성이 전혀 없다.

이와 달리 유성생식은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한 쌍을 이루는 두 염색체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염색체 23개로 이루어진 띠가 만들어진다. 부모가 각기 준비한 이 띠가 결합하여 아이의 23쌍의 염색체가 된다. 이렇게 형성되는 아이의 염색체엔 무려 70조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조합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23쌍뿐이지만, 아이의 유전형질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생명 세계는 세포 분열의 효율성을 포기하고 유성생식의 다양성을 선택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알과 고기를 얻기 위해 다양성을 포기하고 효율성을 선택했다.

화엄종의 4조(祖)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년)은 화엄(華嚴)을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고 했다. 잡다한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된 세계를 말한다. 이와 달리, 한 가지 꽃을 넓은 장소에 심어 놓은 꽃 축제를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사진 몇장 찍고 차 한 잔 마시고 나면 더 있으라고 해도 떠나게 된다. 그 이상 볼 게 없으니까.

밤하늘에는 그리스 미학이 미의 요소라고 꼽았던 규칙이나 배열이나 대칭이나 비율이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건 백색광 안에 숨어 있던 갖가지 색이 드러나서인지 모른다. 생명이 아름다운 건 생명의 역사가 선택한 다양성 때문인지 모른다. 이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우러진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가 어우러지는 잡화엄식의 세계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장미와 백합과 튤립만의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이름 모를 풀과 꽃이 어우러져야 한다.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서로 잘 어우러지는 관계를 맺어야만, 오래 머무를 수 있고 머무를수록 좋은 세계가 나타난다.

양형진 고려대 반도체물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