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팬덤과 헤어질 결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당 대표는 있지만, 리더십은 실종상태다.”

민주당 원로의 개탄이다. 당 지도부가 박진 외교부 장관(9월 29일)에 이어 이상민 행안부 장관(12월 11일) 해임건의안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데 놀랐다며 한 말이다. 169명 의원 전원이 징발돼 통과시켰지만 무슨 실익이 있냐는 거다. 제헌의회부터 지난해까지 장관해임안이 국회를 통과한 건 모두 여섯번이다. 박근혜 정부 때 김재수 농림부장관을 제외하곤 해당 장관 5명은 모두 사퇴했다.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입법부의 강력한 권한이지만, 야당도 권리 행사에 신중했다는 얘기다. 의석수 확보라는 현실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자칫 칼 쥔 손이 베일 수 있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임동원(통일)·김두관(행자) 전 장관의 해임안을 받아들였지만, 법적으론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만용으로 비칠 땐 야당이 되레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명분과 실리, 변덕스러운 여론까지 세밀하게 살필 줄 아는 공력과 혜안이 필요한 고도의 정치행위다. 그런데 취임 갓 100일을 넘긴 이재명 대표(8월 출범) 들어 두 번이나 그 칼을 휘둘렀다.

민주당, 석달새 두 번 장관 해임안
민생법안 처리 막고 입법권 남용
만장일치, 무조건 복종 풍토 심해져
‘팬덤의 강’ 건너야 영토 확장 돼

이 장관에게 책임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태원 참사 책임자 문책과 진상규명을 질질 끌다 사태를 키운 여권의 정국 관리 능력은 정말 한심한 수준이다. 그러나 조자룡 헌칼 쓰듯 입법권을 마구 휘두르는 건 다른 문제다. 결과적으로 실리도 못 얻고 오히려 진상규명 스텝만 꼬이지 않았나.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 문제가 입방아에 오르는 이유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만의 추월을 따돌리기 위해선 한시가 급한 반도체특별법이나 법인세 최고 세율 인하, 전기요금의 급격한 인상을 막기 위한 한전법 개정안 같은 민생 법안은 죄다 막으면서, 지지층이 요구하는 ‘노란봉투법’(불법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 방송법 개정안(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 양곡관리법 개정안(쌀값 하락시 정부 의무 매입 법제화)은 완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오늘(15일) 본회의에선 ‘역대 최초’ 기록이 또 추가될지 모른다. 정부·여당이 짠 2023년 예산안 대신 자신들의 수정안인 ‘민주당 예산안’을 처리하겠단다.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 예산’을 집행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정부 견제가 야당의 임무인 건 맞지만, 만능키 누르듯 하는 입법권 남용은 대의제 역행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소위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묻지마 지지의 팬덤 그룹 말이다.

지난 정권에서 민주당은 팬덤 정치로 시쳇말로 재미 좀 봤다. 하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처럼,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혹독한 실패를 맛봤다. 이재명 체제는 이 어두운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무조건 복종 풍토를 더 확장했다. “만장일치로 대부분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걸 보면서 민주적임을 자부하는 정당이 괴물이 돼가는구나 공포를 느낀다”(김경율 회계사)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재명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까지 겹쳤다. 이 대표는 “1원의 사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탈탈 털어보라”며 결백을 주장하나, 검찰은 대장동 일당에게서 받은 ‘검은돈’이 ‘정치 공동체’ 관계인 최측근(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 구속 수감중)을 통해 선거 자금으로 흘러갔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입증할 증언도 속속 이어지고 있다. 이 대표는 진정어린 해명 없이 ‘야당 탄압’ 프레임으로 맞서고 있다.

성남시장 시절,이 대표는 민원인들이 돈 봉투를 갖고오지 못하도록 시장실에 CCTV를 설치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선 “감옥 간 수하들이 ‘대통령이 다 시켜서 했다’고 하지 않았나. 범죄를 저질렀는데 대통령이라고 예우를 계속 받아야 하느냐”는 연설로 전국적 스타로 부상했다. 이런 ‘이재명다움’을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그의 길어지는 침묵은 납득하기 어렵다. 야당 총재시절,  DJ는 측근의 수뢰설이 보도된 조간신문을 보곤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어 “검찰이 부르기 전에 자진 출두해서 사실대로 밝히라”고 지시했다. 지도자 주변의 작은 잡음이나 도덕성 문제가 불씨가 돼 리더십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정권교체에 실패한 건 강성 팬덤에 의존해 작은 일탈에 대한 조기 경보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선 정당으로 낙인 찍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었다. 그런 면에서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위원장 시절) 조국 전 장관이 사과하고 이 강을 건너자, 이 강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일을 어느 정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재명의 강’이 생길까 두렵다”고 말했다. 또 “이 강을 건너야 우리의 영토를 더 확장할 수 있다. 내 살을 도려내는 결단이 민주당에 필요하다”고 했다. 팬덤과 ‘헤어질 결심’을 요구한 용기 있는 발언이다. 이 소망이 실현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민주당을 지켜보는 국민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