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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감을 믿지 말자’…2만2000보 걸은 후 깨달은 것

중앙일보

입력

[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11)

친한 친구가 경기도에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서울 도심에서 꽤 멀고 전세금도 비싸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을 방문하자 그 선택이 이해되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아파트 단지, 가지런한 보도블록, 부드럽게 여닫히는 창문과 시원한 전망, 그중에도 가장 놀란 건 엘리베이터에도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지방 본가도 구축 아파트인 나로서는 처음 보는 시설이었다.

넓은 식탁에서 친구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창밖 풍경을 보는데, 마음속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 집에 돌아온 나는 인터넷으로 내 집 마련 부동산 강의를 수강 신청했다.

무주택자인 나도 부동산에 대해 종종 걱정한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데 결국은 집값이 내려가지 않을까? 무리해서 대출했다가 집값이 내려가면 어떡하지? 내가 아파서 일을 못 하게 되면 어쩌지? 집값 걱정이 무색할 만큼 최근 몇 년간 집값은 큰 폭으로 올랐다. 10년을 모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던 구축 아파트가 이제는 30년을 꼬박 모아도 사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하는 걱정은 그냥 변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무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걱정만 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하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공간에 살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지 않았다. 처음으로 3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내가 꿈꾸어볼 수 있는 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의는 온라인으로 한 달간 수강했다. 첫 수업은 적정 예산을 계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현재 가진 종잣돈과 대출할 수 있는 금액을 최대로 더하니 3억 5000만원 정도의 돈이 나왔다. 부동산 앱에서 그 금액으로 구할 수 있는 아파트를 검색했다. 경기도 외곽까지 한참을 가서야 몇 개를 겨우 찾았다. 출근을 하려면 1시간이 넘는 지역이지만 일단 가능한 아파트 목록을 모았다.

[그림 최창연]

[그림 최창연]

두 번째 수업 과제는 분위기 임장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부동산 강의를 들으며 ‘임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임장’이란 ‘현장에 임한다’라는 뜻으로 직접 발품을 팔아 그 지역을 알아보는 것을 뜻한다.

임장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분위기 임장(분임)이란 구 단위로 나누어 한 지역을 걸어 다니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 외에도 부동산에 전화해 인터넷에 올려진 매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 보는 ‘전임(전화 임장)’, 그리고 직접 매물을 보는 ‘매임(매물 임장)’ 등이 있다.

10월 중순, 같은 수업을 듣는 분들과 모여 경기도 어느 지역으로 분임을 갔다. 지하철역에서부터 그 지역의 대장 아파트(시세를 주도하는 아파트)부터 주변 상가를 돌아보며, 크고 작은 단지 20개 정도를 돌아다녔다. 걸으면서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지역인지, 지금 매매가가 적정한지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모두 기초반을 듣는 사람들이므로 사실 아무도 정답을 알지는 못했다. 단지들의 매매가를 검색하며 이렇게 낡고, 작고, 오르막에 있는 아파트도 역시 비싸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분위기임장에서 내가 한 생각은 ‘나는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가?’였다. 건물만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까지 모두 나의 집이다. 살기 좋은 곳은 주변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교통이 편리해 집값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좋은 집이 곧 좋은 투자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더 많이 생각한 것은 ‘나는 집을 위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였다. 집값이 오르길 기다리며 노후 주택에 거주하거나, 1시간 반이 넘는 장거리 통근을 할 수 있을까? 몸테크는 여전히 나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

쉬지 않고 2만 2000보를 걸은 우리는 너무 추워 근처 기사식당에 들어가 허겁지겁 9000원짜리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국밥을 먹으며, 요즘 하는 짠테크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막연한 걱정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걱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막연함이 사라졌다. 대신 구체적이고 선명한 고민이 남았다.

분임 이후, 시간이 나면 부동산 앱을 켜고 내가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종종 찾아본다. 멀리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아득한 기분이 드는데, 그럴 때는 가만히 우선순위를 따져 본다. 집을 사고자 했던 이유의 가장 위에는 당연히 내가 있다. 열심히 일하며, 사랑하는 이를 챙기고, 편하게 휴식하는 공간에 대한 욕구가 있다.

부동산 강의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는 ‘감’을 믿지 말고 제대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히 집값이 내려가길 기다리며 한탄하고 있을 게 아니라. 또 하나, ‘좁쌀은 굴려봤자 좁쌀’이라는 생각도 버렸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지금 모으면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힘이 된다. 열심히 쓰고 있는 가계부가 허튼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아낀다.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고민한다. 쪼개서 생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내가 원하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2만 2000보를 걷고 콩나물국밥을 먹은 그 날의 나처럼, 하루하루에 열심히 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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