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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에 '맨몸 잡부'만 죽는다"…밥벌이 허탕친 그들의 울분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9일 오전 5시30분쯤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에서 구직자들이 구인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9일 오전 5시30분쯤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에서 구직자들이 구인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9일 오전 5시30분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 문이 열리자마자 구직자 20여명이 안내소로 밀려 들어왔다. 삽시간에 안내소 대기실을 가득 메운 이들은 대부분 50~60대 남성이었다. 명부를 작성한 뒤 번호표를 뽑은 구직자들은 신문을 펼쳐 들거나, TV 뉴스에서 나오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운송거부에 닫힌 공사장, 인력시장 사람 몰렸다  

이 안내소는 부산시가 운영을 맡긴 공공 취업알선 센터다. 민간 인력사무소와 달리 알선 수수료(노임의 10%)가 없으며 주로 차상위계층 등 저소득층이 건설현장 말단인 이른바 ‘잡부’ 일용직을 찾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장기화로 부산 공사현장 335곳 중 108곳(32.2%)이 작업을 전체 또는 일부 중단하면서 일자리 사정은 크게 나빠졌다. 일자리를 찾으려 안내소를 방문한 사람은 지난달 하루 평균 41.6명에서 이달 들어 44.3명으로 늘었다.

“파업 여파로 잡부만 죽어나”  

이곳에서 만난 A씨(62)는 “휴대전화 요금 포함해 공과금 치러야 할 날이 다가옵니다. 오늘은 꼭 일을 나가야 할 텐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해까지 부산지역 택시 회사에서 법인택시를 몰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손님이 크게 줄며 사실상 권고사직 당했다고 한다.

9일 오전 5시30분쯤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 대기실에서 구직자들이 이상언 팀장의 바뀐 노동법에 대한 안내말을 듣고 있다. 송봉근 기자

9일 오전 5시30분쯤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 대기실에서 구직자들이 이상언 팀장의 바뀐 노동법에 대한 안내말을 듣고 있다. 송봉근 기자

A씨는 “중장비 기사나 형틀(목수) 같은 기술자는 이미 전북 등 다른 지역 공사장에서 모셔갔다"라며 "건설노조가 화물연대 운송거부에 동조파업을 한다지만, 이들 기술자는 공사현장에서 필수 인력이라 수요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사 중단으로 결국 죽어나는 건 나 같은 ‘맨몸 잡부’들”이라고 덧붙였다.

안내소 측은 ‘현장 콜’(공사장 등 현장에서 오는 인력 파견 요청 전화)을 받으면 대기하는 인력을 순번에 따라 파견한다. 하지만 이 ‘순번’이 늘 지켜지는 건 아니다. 60대인 데다 고혈압이 있는 A씨는 “60을 넘겼거나 혈압이 높은 인력을 기피하는 공사 현장도 있어 공칠 때가 많다. 일찍 와서 번호표 2번을 뽑아 놨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안내소에서 겨우 자리를 얻어 온종일 고되게 일하면 A씨 손에는 11만원이 쥐어진다. 초조한 듯 대기실에 놓인 커피를 종이컵에 타 마시던 A씨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루 평균 40여명이 이곳을 찾지만, 3명 중 1명은 발걸음을 돌린다.

“생계 휘두르는 파업, 지긋지긋합니다”

“청소 잡부 하실 분이 필요한데요. 건장하고, 60세 안 된 분으로요.” 오전 6시쯤 취업안내소에 아파트 공사장에서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이에 60대인 A씨 대신 B씨(51)가 파견됐다. 건물 청소와 관리 업무를 했다는 B씨 또한 코로나19 영향으로 2년 전 실직하고 공사현장 잡부로 떠돌았다고 한다. 그는 “파업(집단운송거부)에 현장 잡부 자리나마 하늘에 별따기가 됐다”며 화물연대를 원망했다.

9일 오전 6시쯤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에서 구직자들이 난로에 손을 녹이고 있다. 송봉근 기자

9일 오전 6시쯤 부산시 일일취업안내소에서 구직자들이 난로에 손을 녹이고 있다. 송봉근 기자

B씨는 “지난 6월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때도 생활고를 겪었다. 민주노총에 가입해보려고도 했는데, 일용직 잡부인 데다 ‘공사판 출신’도 아니라며 거절하더라”고 했다. 그는 최근 국비가 지원되는 직업전문학교에서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B씨는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데 민주노총이 파업할 때마다 밥벌이가 끊길까 불안하다”며 “일과 병행하기 힘들지만, 목수 일을 배워 기술자가 되면 적어도 노조 파업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번 집단운송거부도가 끝나도 한동안 취업난이 이어질까 봐 걱정된다”며 취업안내소 문을 나섰다.

전북도 불똥…인력사무소 나온 절반 허탕 

화물연대 파업 불똥은 전북에도 튀었다. 가뜩이나 일이 적은 겨울철에 시멘트와 건설 자재 공급마저 끊기면서 일부 건설 현장이 멈췄다. 이날 오전 5시30분쯤 전북 전주시 팔복동 한 인력사무소는 구직자 10여명으로 북적였다. 일당 15만원(중개 수수료 10% 포함)을 벌기 위해 새벽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명예퇴직자·자영업자·고물상 등 저마다 처지가 달랐다. 박모(55)씨는 “사업이 망하고 일용직 생활을 한 지 4년 됐다”며 “매일 인력사무소에 나오는데 일주일에 사나흘은 일이 없다”고 했다.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16일째인 9일 오전 7시쯤 전북 전주시 팔복동 한 인력사무소에 일자리를 구하러 나온 일용직 노동자들이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김준희 기자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16일째인 9일 오전 7시쯤 전북 전주시 팔복동 한 인력사무소에 일자리를 구하러 나온 일용직 노동자들이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김준희 기자

"적당히 요구해야" 민노총에 불만도 

오전 6시가 지나자 트럭과 승합차가 속속 도착했다. 완주 아파트 건설 현장 등 도내뿐 아니라 전국 일터로 가는 차량이다. 인력사무소 대표 조모(60)씨가 이름을 부른 노동자들이 서너 명씩 차에 타고 인력사무소를 떠났다. 조 대표는 “경기 침체에다 화물연대 운송거부 사태까지 겹쳐 일거리가 예년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그는 “눈비가 오기 전 일손이 많이 필요한 때지만 사무소에 오는 이들 중 절반은 허탕을 치고 돌아간다. 파업 기간이 길수록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파업을 주도한 민노총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고물을 줍는다는 곽모(52)씨는 “용접이 전문인데, 요즘엔 일이 없어서 그냥 인력사무소에서 보내주는 대로 간다”며 “막노동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민노총은 적당히 졸라야(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9일 오전 7시쯤 전북 전주시 팔복동 인력사무소 앞에 도착한 트럭에 한 일용직 노동자가 타고 있다. 김준희 기자

9일 오전 7시쯤 전북 전주시 팔복동 인력사무소 앞에 도착한 트럭에 한 일용직 노동자가 타고 있다. 김준희 기자

화물연대 '총파업' 철회 투표, 부산은 무투표 해산 

한편 화물연대는 9일 오전 9시부터 ‘총파업’ 철회 여부를 놓고 조합원 투표에 나섰다. 조합원 2만6144명 중 3574명(13.67%)이 투표에 참여, 이 중 2211명(61.82%)이 파업 종료에 찬성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를 진행하지 못했다. 화물연대 부산본부는 이날 오전 10시30분 투표 없이 해산하라는 결정을 각 지부에 전달했다. 일부 조합원이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물연대 부산본부 측은 이번 찬반 투표를 '파업 책임을 조합원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로 규정해 아예 투표를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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