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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달간 매주 찾아 마음의 문 두드렸다…루게릭병 환자 살린 이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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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초구 최문희 통합사례관리사는 위기가구로 의심되는 A씨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일주일에 한 번씩 A씨의 집 앞에 음식과 편지를 두고 왔다. 편지 내용은 문자로 한 번 더 보낸다. (사진 왼쪽). 사진 최문희 사례관리사

서초구 최문희 통합사례관리사는 위기가구로 의심되는 A씨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일주일에 한 번씩 A씨의 집 앞에 음식과 편지를 두고 왔다. 편지 내용은 문자로 한 번 더 보낸다. (사진 왼쪽). 사진 최문희 사례관리사

“외출도 하지 않고 3개월째 월세가 밀린 분이 계시는데,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요?”

지난 4월 서울 서초구 한 주민센터로 이런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다. 건물 관리인이라고 한 이 사람은 입주민을 걱정했다. 이 말을 들은 최문희 서초구 통합사례관리사와 주민센터 직원이 나섰다. 통합사례관리사는 도움이 필요한 주민 이야기를 듣고 복지 서비스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최 관리사 등이 해당 입주민 집을 찾았을 땐 각종 고지서가 쌓여 있고, 단전 안내문이 현관문에 붙어 있었다.

4개월간 매주 찾아 위기가구 발굴 

루게릭병 환자로 거동이 불편한 50대 여성 A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외출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처음엔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며 최 관리사 등을 돌려보냈다. 최 관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를 찾아 현관문 고리에다가 먹을거리와 편지를 걸어 두고 왔다. 편지엔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썼다.

최 관리사는 4개월간 설득 끝에 A씨 동의를 얻어 긴급복지지원·기초수급·긴급의료지원·물품지원 등을 신청했다. A씨는 현재 재활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정도로 변했다. 최 관리사는 “관리인 신고가 아니었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지자체에 적극적으로 알려주신다면 (어려운 분을) 도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 모습.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 모습. 연합뉴스

코로나19로 사회적 교류 더 위축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질병 등으로 고립되는 사람이 늘면서 지자체마다 복지 사각지대 줄이기에 나섰다. 특히 지난달 신촌 모녀 사망 사건 등 고독사가 잇따르자 위기가정 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다. 신촌 모녀는 전기요금을 수개월째 내지 못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위기 가정을 찾기 위해 상당수 지자체는 민·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또 이웃 간 위기 징후를 포착하고 기관에 알릴 수 있도록 매뉴얼을 만들거나 부동산·병원·편의점 등 생활 밀접 시설을 이용해 찾고 있다. 위기가구란 경제적 어려움이나 건강 문제, 사회 고립 등으로 인하여 도움이 필요한 가구를 말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복지순찰대 늘리고 매뉴얼 제작 

서울 서대문구는 내년부터 복지순찰대를 종전 3300명에서 8400명으로 늘린다. 이들은 가스검침원·요구르트 배달원·우체부 등에서 뽑았다. 복지순찰대는 동네를 돌며 요금 고지서 등이 쌓인 우편함을 살펴 위기가정을 찾는다. 서대문구는 또 관내 740여개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임차료 체납 가구가 발생하면 주민센터에 알리는 ‘복지네트워크’도 만들기로 했다.

서초구는 ‘위기 가구 찾는 법 안내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매뉴얼엔 유심히 살펴볼 이웃 유형을 16가지로 나눴다. 우편물이 수북하거나 여관·모텔에 장기 투숙하는 경우, 아파트 관리비를 3개월 이상 체납하는 경우 등이다. 위기 징후를 포착한 주민은 서리풀 돌봄 콜센터, 주민센터, 서초누비단(카카오톡 채널)에 신고하도록 했다. 앞서 충북 증평군은 지난 7월 퀵 배달업체 4곳과 손을 잡았다. 배달 업체 직원 207명이 참여해 관내 저소득층 30가구를 관리한다. 이들은 음식을 배달하며 안부도 묻고 이상 징후를 감지하면 읍면사무소나 군청에 연락한다.

성과가 나타나는 곳도 있다. 경남 함안군 ‘함안애(愛) 희망발굴단’은 갑자기 경로당 발길을 끊은 독거노인 정모(84)씨에 주목했다. 집을 찾았더니 정씨는 폐렴에 우울증까지 걸린 상태였다. 처음엔 도움과 상담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사례관리를 통해 정씨는 현재 기초생활수급 지원과 함께 병원 진료도 꾸준히 받고 있다. 발굴단은 이렇게 지역 내 고위험 위기가구를 미리 파악하고 안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 결과 올해에만 762건의 위기 가구를 찾았다.

서초구 위기가구 발굴 매뉴얼. 자료 서초구

서초구 위기가구 발굴 매뉴얼. 자료 서초구

사각지대 위기가구 40만 명 추산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은둔형 위기가구’가 많은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고독사 추정’ 인원은 3159명으로 2017년보다 57.3%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가구는 약 4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문가들은 결국 ‘관계 중심의 복지 사각지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한다. 최지선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교수는 “지자체·사회복지 기관·주민 등 연계해서 만들어갈 수 있는 관계 중심의 발굴 시스템이 다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위기가구를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들을 복지 안전망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위기 발굴에 참여하는 공무원·주민이 역량을 모을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 정보 등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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